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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혜원 통해 서양의약품 익숙해져 … 60년대 연 평균 36% 고성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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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제약기업인 동화약방, 대한약품공업협회 서울시지부 제4회 정기총회(1957년 7월 25일)를 마치고, 광복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의 삼일제약관, 셀트리온 램시마(왼쪽부터). [사진 한국제약협회]

우리나라 제약산업은 민족의 역사적 굴곡과 함께 발전해 왔다. 국내 최초의 서구식 왕립병원 광혜원(廣惠院)이 설립되면서 서양의술과 의약품이 자연스레 스며들었다.

 현대적 기업형태의 제약산업은 1910년, 치욕스런 일제식민통치가 시작되면서부터 모습을 갖췄다. 총독부는 1912년 1912년 약품영업취체규칙(藥品營業取締規則) 등 약률(藥律)을 제정·공포하면서 약품 취급의 업무 범위와 취급자 자격 등을 제도화했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은 패망했지만 약업계는 정국 혼란과 미국의 잉여 의약품 범람 및 원료난으로 삼중고를 겪어야했다. 광복 직후 군정시대 남한에는 217곳의 제약업소가 있던 것으로 집계되지만 사회 정황 탓에 실제 가동된 업체는 유한양행을 포함한 30여 곳인 것으로 가늠된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듬해인 1949년은 의약품을 수출입할 수 있는 정식 통로가 열린 해였다. 하지만 제약산업은 1950년 발발한 6.25전쟁으로 곤경을 맞는다. 약업인들은 대도시 제약공장을 남겨둔 채 서둘러 피난지인 부산과 대구로 몸을 숨겨야했다. 부산은 자연스레 의약품 시장의 집결지로 부상했고, 완제의약품 수입이 본격화된 이후 전국 의약품 시세를 좌우하는 집산지로 자리매김했다.

 제약산업의 1960년대는 발전의 도약기다. 10년 동안 연평균 35.5%의 고도성장을 기록했다. 이 기간의 성장규모만 약 20배에 달한다. 1960년대는 또 궁핍의 시기였다. 오랜 전란의 여파로 국민의 영양상태가 부실해졌고 제약업계는 비타민제와 영양제의 개발에 앞장섰다. 1970년대도 60년대에 이어 의약품 등의 생산이 활기를 띠던 시기다. 1970년 361억 원이던 의약품 생산실적이 1979년에는 5311억 원으로 급증했다.

 의약품 광고도 제약 산업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우리나라 의약품 광고의 효시는 1896년 11월 7일 독립신문에 게재된 의약품 수입상사 세창양행의 금계랍 광고인데 이후 1897년 동화약방의 활명수가 호평을 받으면서 의약품 광고가 급물살을 탔다. 1960년대 들어 상업방송이 본격 등장하자 제약협회는 1989년 2월부터 의약품광고자율심의위원회를 구성, 사전심의제도를 운영하며 업계의 자율 정화를 도모했다. 2000년대 도입된 의약분업과 뉴미디어의 등장은 제약산업 전반에 걸친 변화를 가져왔고 마침내 2005년 의약품 대중광고의 허용범위가 모든 일반의약품으로 확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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