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396)제26화 경무대사계(23)|<제자는 필자>윤석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정부 수립 전후>
대한민국 제1차 내각의 조각은 8월4일에 막을 내렸다. 다음날인 5일 상오10시 역사적인 첫 국무회의가 중앙청에서 열렸다.
이 대통령·국무총리 이하 12부 장관 및 이미 임명된 공보(김동성)·법제처장이 모두 참석했으나 이시영 부통령만은 불참했다.
성재 선생은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 외에도 대통령이 조각 인선 과정에서 너무 부통령을 경원했다는 노여움이 있었던 것 같다.
이 대통령은 성재를 인간적으로는 선배대접을 해 호칭도 꼭「성재장」이라고 불렀지만 공적으로 소외감을 갖지 않을 만큼 존중해주고 상의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부통령을 무시한다기보다 이 박사의「원맨쉽」이 강한 성격 때문이었다.
어쨌든 조각이 있은 뒤 얼마 후 성재는 이 회장을 찾아와 서운하다는 얘기를 해 한동안 두분 사이가 서먹서먹했다. 결국 주위에서 철기·동산·애산(이인)등이 들어서 와해를 시켜 후에는 성재도 국무회의에 참석하게는 됐지만-.
이 대통령은 대통령취임 후에도 한동안 이화장에 머무르다가「하지」가 이사한 뒤 8월12일 경무대로 이사했다.
경무대는「하지」가 쓰면서 화장실만 수세식으로 고쳤을 뿐 모두가 일본총독이 쓰던 대로였다. 대통령이 써야 할 2층은「다다미」방 뿐이었고-.
이 박사는 일본냄새가 난다고 질색이었다.
『이「다다미」담장 취워. 왜놈 냄새가 심해』-.
그러나 비서들이 막장「다다미」를 치우고 마루를 깔려고 준비하자 그것은 너무 돈이 많이 드니 그대로 두자고 했다.
결국 대통령의 직무실과 침실만 우선「다다미」를 치우고 마루와 주단을 깔았다.
그리고 우선 급한 대로 이조 때의 장롱, 문갑 등을 몇몇 유지에게 얻어 직무실을 한국풍으로 장식했다.
경무대는 이렇게 국가예산이 아닌 선사품으로 장식한 것이 많아 후에 재산문제까지 생기지만 어쨌든 이대통령은 국가예산을 들여 경무대를 꾸미는 것을 싫어했다.
경무대로 거처를 옮기기 전부터 이대통령은 중앙청의 대통령 직무실을 사용했다. 그러면서 실무자들이 군정으로부터 업무인계를 받았는데 말썽 많았던 경찰권 이양문제를 함해 정권 인계에「하지」의 비서였던 이묘묵 박사의 수고가 많았다.
이묘묵씨가 후에 주영대사로 임명된 것은 이때 이박사가 그에게 품은 호의 때문이다.
군정이양이 끝난 후「하지」는 중앙청으로 이대통령을 방문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앙숙이던 두 사람의 회견은 몹시도 감동적이었다.
「하지」가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서자 이 대통령은 그를 얼싸안고 등을 두드렸다. 언제 무슨 감정이 있었더냐시피 뺨까지 대며「하지」를 맞아들였다.
『「프레지던트·리」, 승리하셨습니다. 정말 고집으로 승리한 것입니다.』
『장군의 협조 때문입니다. 장군의 협조가 많아 이 나라가 독립하게 된 것입니다. 장군이야말로 우리나라 독립의 공로자입니다.』
『저야 임무를 수행한 것뿐이고「닥터·리」야 말로 독립을 쟁취한 승리자이십니다.』
이 박사와「하지」의 회견은 약20분 정도 계속됐다.
「하지」가 나가자 대통령은『정치적 머리가 없어 탈이지, 사람은 좋은 사람이야. 남의 나라에서 군정을 하려면 정치를 해야지, 군대서 하던 식으로 국무성 명령에만 매어서야 되나』하고 혼잣말하듯 했다.
5·10선거 후 바쁜 3개월이 지나고 해방3주년을 기념하는 1948년8월15일, 중앙청광장에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식이 열렸다.
연합군 최고사령관「맥아더」원수와 점령군 사령관「하지」중장이 국빈으로 참석한 식전에서 이 박사는 만주모범국가의 건설을 전국민의 이름으로 세계에 선언했다.
이 뜻깊은 식사에 군정대 민주의원대표로 외교의 공을 세웠다해서 특정인을 칭찬하는 귀절이 들어있었다. 내가 대통령께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지만 막무가내였다.
한때 이것이 묘한 입방아와 얽혀 대통령께 좋지 않은 구설수가 됐던 기억이 난다.
정부수립과 동시에 미군정도 폐지됐다. 미국정부는 최고사령관이었던「하지」를 그대로 군사령관으로 둘 수가 없어 즉각 후임 8군사령관에「콜터」소장을 임명하고「하지」를 소환했다.
「하지」가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유석과 창낭은 대통령에게 성대하게 환송회를 열어줄 것을 건의했다. 이대통령도 극구 찬성했다. 8월24일 창덕궁에서 열린 환송회에서 이대통령은 그간의 불목을 푸는 따뜻한 환송사를 했다.
『「하지」장군은 우리의 독립을 돕고 공산당을 반대하여 이 땅에 민주정부가 수립되도록 많은 공을 세웠읍니다. 과거 우리들 사이에 사소한 갈등이 있었기 때문에 내 말을 진심이 아니라는 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갈등은 모두 한국의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한 것이니 만큼 나는 조금도 불평이 없으며 지금은 그저 우리 국민의 은인을 떠나보내는 섭섭한 생각뿐입니다』-.
3년간 이 나라를 통치하던「하지」는 8월27일 본국으로 떠났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