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중앙시평

도덕적 원칙과 현실적 외교안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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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장달중
서울대 명예교수·정치외교학

최근 한 토론회에서 관계와 학계, 정계를 두루 거친 전직 대사가 말문을 열었다. 우리 외교안보 정책이 너무 ‘도덕적 원칙’에 매달려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동북아 정세의 격변에 ‘현실주의적’으로 대응해야 할 것 같은데 우리 외교안보 당국자들에게 그런 인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키신저와 같은 현실주의적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지만 모두 북한의 ‘진정성’이나 일본의 역사인식과 같은 도덕적 문제에 얽매여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요즈음 각종 회의에 가보면 키신저와 같은 책사(策士)에 의한 외교적 돌파가 필요하지 않으냐는 주장이 적지 않다. 남북대치와 한·일 갈등의 터널에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 키신저는 국제관계에서 도덕적 원칙보다 현실적인 관계개선을 우선시하는 이론가요 실천가였다. 그래서 그는 늘 세력균형을 중시했다. 그의 지론대로 동북아는 1972년 미·중 화해 이후 일종의 세력균형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지금 이 균형이 위태로워지고 있다. 북한의 핵개발, 중국과 일본의 군비증강, 영토분쟁, 민족주의적 흐름 등으로 동북아 정세가 위태롭기 짝이 없다. 호주의 총리을 역임했던 케빈 러드 같은 정치가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위태롭게 하는 ‘실존적 위협(existential threat)’이 등장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동북아에는 이를 안정시킬 현실적인 노력도 외교문화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외교의 논리가 정치와 도덕의 논리에 압도되고 있기 때문이다.

 외교안보 정책에는 늘 도덕적 원칙과 현실적 접근 간에 긴장이 있게 마련이다. 키신저의 회상이 리얼하다. “백악관에 들어가서 부닥친 가장 심각한 고민은 대통령이 ‘핵무기 말고는 다른 대응 방법이 없지 않으냐’고 말했을 때였다”는 것이다. 소련을 비도덕적 국가로 밀어붙이면 핵전쟁의 위험은 증가할 것이며, 대신 타협의 자세를 보이면 핵대결의 주도권이 소련에 넘어갈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버드대 법대 교수인 매리 글렌던이 그녀의 저서에서 전하는 키신저의 회상이다.

 지금 우리 외교안보 정책 담당자들도 비슷한 고민에 직면해 있을지 모른다. 박근혜 대통령이 북한이나 일본의 ‘진정성’ 말고 다른 대응방법이 없지 않으냐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키신저처럼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고민이 적지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들에게서 이런 고민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 모두 대통령의 ‘말씀’을 복창하는 데 급급한 듯한 인상이다. 그래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이제 박근혜정부도 도덕적 원칙은 내세우지만, 관계개선은 현실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반공보수의 강경파인 닉슨 대통령이 키신저의 책략에 따라 미·중 데탕트를 연 것과 같은 외교안보 전략 말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박 대통령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와 동북아 평화구상이 도덕적 원칙의 틀 속에 갇혀 한 걸음도 진척을 보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키신저의 회상에 따르면 외교안보 정책에서 가장 필요한 일은 ‘중요한 것’과 ‘위급한 것’을 구분하는 것이라고 한다. 정책담당자는 중요한 것보다 위급한 것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말이다. 항상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확인할 수도, 얻어낼 수도 없을지 모를 북한이나 일본의 진정성에 매달리기보다는 불가항력의 무지와 부딪쳐가면서 현실적 외교교섭을 시도하라는 것이다. 강 건너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 채 루비콘 강을 건너야 하는 것이 정치가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강 건너편을 확인하기 전에는 강을 건너지 않겠다던 박 대통령. 지난 3일 프랑스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의 진정성’을 전제로 한 남북정상회담 가능성을 언급했다. 통일부도 5·24 조치의 해제를 고민하고 있다는 보도다. 환영할 일이다. 북한의 진정성이나 일본의 역사인식도 중요하지만, 북핵 문제와 같은 위급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현실적 접근이 보다 시급하기 때문이다.

 키신저가 강조했다. 외교안보란 ‘가능의 제약 속에서’ 현실적 타협을 이끌어 내는 것이라고. 도덕적 원칙에 따라 궁극적 목표에 올인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이다. 전쟁과 같은 엄청난 재앙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분적이지만 현실적인 해답을 통해 궁극적인 목표로 가는 길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실존적 위협, 5년이라고 하는 제한된 시간, 박 대통령의 현실적인 외교안보 이니셔티브를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

장달중 서울대 명예교수·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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