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년·망년|장덕순<서울대문리대 교수·국문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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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건망증이 때로는 큰 낭패를 가져오지만 이와 반대로 잊어버린다는 생리가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지 모르겠다. 1971년은 영영 잊어버리고 싶은 해이다. 정녕 한 순간이 초조할 정도로 저주스러운 액년이었다.
자랑 할만 한일, 떳떳한 업적 하나도 없다. 오히려 부끄럽고 구차스런 부스럼만이 닥지닥지 엉켜 있는 해가 바로 신해 년이었다. 도대체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 얼마나 많았는가? 이제 낱낱이 들어보기조차 싫은 이 수치스러운 해를 이젠 잊어 버려야 하겠다.
나는 소위<망년회>라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작년 25일 저녁에는 나 혼자 집에서 <망년>의 술잔을 들었다. 이 지긋지긋한 해를 하루라도 빨리 잊어버리기 위해서이다.
백 운 대의 인수 봉에서 젊은이들이 대롱대롱 매달려서 얼어죽은 참사를 잊어버리기 위해서였는데 이날 또 많은 생명이 호텔에서 불에 타죽었다니 이 비극도 잊어버리기 위해 나는 숙연히 술잔을 들었다.
『잊어버리자! 잊어버리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다』라고 독백하면서…. <망년>의 술잔으로 푹 취하고 싶어서였다.
그리고 새해 아침에는<망년>의 술잔을 들리라. <망>은 희망을 뜻한다. <망구>는 81세를 희망하는 뜻이요, <망백>은 아혼 한 살에서 백수를 희망한다는 뜻이다.
지긋 지긋한 신 유년은 <망>으로 달래고 임자의 새해는 <망>으로 희망을 가져보자는 것이다.
이 현실은 <망>의 기대도 허무할 것만 같으나 그렇다고 묵은해를 보내는 이 순간 어찌 체념, 절망, 암 당에서 만 허덕이겠는가? 속아 사는 이 세상이며 또 한번 속아 사는 겸 억지로 자위하면서 <망년>의 술잔을 들어보자는 것이다.
새해는 <쥐>의 해라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쥐>가 국가의 위기를 구했다는 이야기를 전한다. 요증과 궁주가 음모하여 비처 왕을 죽이려했다. 이 엄청난 비밀을 <쥐>가 알고 왕에게 일러바쳤던 것이다 그리하여 국가의 위기를 모면하였다. 부디 새해에는 이<쥐>의 기적이라도 믿어보려는 심적이기도 하다.
우리 고전 소설에 <쥐전>이었다. 여기 요사스럽고 간악한 <다람쥐>가 착하고 후덕한 쥐를 모략 증상 하려고 한다.
이것을 안 <다람쥐>의 아내는 극력 이를 반대한다. 그러나 남편은 듣지 않고 그 부정을 감행 하려했다. 이때 <다람쥐>의 아내는 의연히 그 남편을 버리고 집을 나가고 만다.
불의와 부정과 부패에 항거하고 나간 이 정의의 <쥐>가 정녕 새해의 상징이 되어 주기를 빌어 마지않는다.
묵은해를 보내는 이 순간 나는 미물인 <쥐>의 기적을 바랄 정도로 약해지고 무력해진 것을 슬퍼한다.
그러나
『묵은해는 깨끗이 잊어버리자. 망년! 망년!』
그러면서
『새해여, 희망을 가져 오라! 망년! 망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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