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짬날 때마다 적과의 심야 만찬 며느리도 모르는 비법 공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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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호 14면

내로라하는 셰프들이 지난 2일 늦은 밤 와인 한 잔씩 들고 모였다. 왼쪽부터 신동민(미코), 최현석(엘본 더 테이블), 장명식(라미띠에·장스테이크하우스), 노영희(품·철든부엌), 오세득(줄라이), 임기학(레스쁘아) 셰프. 조용철 기자

센트럴파크의 낙엽과 연인들이 아름답게 그려졌던 영화 ‘뉴욕의 가을’.

파인 다이닝 이끄는 6인의 셰프

투명하고 아름다운 22세의 위노나 라이더가 사랑했던 리처드 기어는 40대의 레스토랑 오너였다. 스무 살 차이의 사랑이란 설정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건 미국 내에서 레스토랑 오너와 스타 셰프가 선망의 대상인 까닭이다. 이처럼 셰프가 단순 기술자 아닌 예술인으로 추앙받는 시대가 이 땅에서도 이미 시작됐다. 매니어들 사이에선 연예인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고 있는 스타 셰프. 예술인다운 개성과 고집으로 여간해선 한데 어울리기 힘들 법한 이들이 만나 서로를 격려하고 지혜를 나누는 뜻깊은 모임이 있다.

“돼지 귀는 살짝 볶아야 풍미가 좋아져.” “육수를 빨리 우려내려면 소머리가 최고지.”

지난 2일 자정 무렵의 고즈넉한 서울 청담동. 이곳에 자리 잡은 레스토랑 ‘품’ 노영희(51) 대표의 작업실 ‘스튜디오 푸디’에선 그를 포함해 여섯 명의 스타 셰프가 이야기꽃을 피웠다.

서울 서래마을에서 프렌치 레스토랑 ‘줄라이’를 운영하는 오세득(37) 셰프가 최근 돼지 60마리를 잡았다는 얘기를 꺼내자 각자의 고기요리 비법이 쏟아졌다. 남산에서 모던 한식 레스토랑을 성공시킨 노 대표가 좌장 격인 스타 셰프들의 모임이다. 프렌치와 퓨전 일식·한식 등 각자의 분야에서 빼어난 숙수(熟手)인 이들은 어찌 보면 서로에게 최고의 경쟁자일 수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짬이 날 때면 한곳에 모여 요리와 레스토랑 경영에 대한 노하우를 나누고 진지하게 토론한다. 요리에 대한 사랑이 이들을 서로의 적이 아닌 동지로 맺어주는 접착제인 셈이다.

이 모임이 만들어진 건 6년 전쯤이다. 파인다이닝에 심취한 한 블로거가 유명 셰프들을 불러모아 자리를 함께한 게 계기가 됐다. 초반엔 멤버가 더 많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지금의 정예들만이 남았다. 이들은 2007년부터 ‘노느님(노영희+하느님)’으로 통하는 큰누님 노 대표를 축으로 한두 달에 한 번씩 얼굴을 본다. 레스토랑이 끝나야 올 수 있는 터라 모임은 빨라야 밤 11시에 시작한다.

구성원들 면면은 화려하다. 국내 파인다이닝(fine dining·고급 요리)계의 시작이자 현재·미래를 대표한다. 케이블TV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인지도까지 높아진 오 셰프를 비롯, ▶서울 신사동의 터줏대감 프렌치 레스토랑 라미띠에의 장명식(42) 셰프 ▶‘미역냉국맛 셔벗’ 등 독특한 레시피로 인기가 높은 ‘엘본 더 테이블’의 최현석(40) 셰프 ▶일본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은 서울 청담동 일본식 레스토랑 ‘미코’의 신동민(34) 셰프 ▶‘찬바람이 불면 먹어줘야 하는’ 양파수프로 유명한 서울 청담동 ‘레스쁘아’의 임기학(34) 셰프가 그 멤버다. 이들은 사회봉사에도 열심이다. 올봄엔 의기투합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한 도시락을 만들어 기부하기도 했다. 국내 최고 셰프들의 도시락엔 오리고기 주먹밥부터 스테이크 파니니(살짝 구운 샌드위치) 등이 담겼다.

셰프들도 배가 고프다. 이날엔 노 대표가 특별히 마련한 야식으로 간장게장·현미밥이 상에 올랐다. 밥 한 그릇을 순식간에 뚝딱 비운 후배 셰프들을 위해 노 대표가 즉석밥을 가져온다. 셰프가 밥을 전자레인지 따위에 데울 리가 없다. 프랑스산 고급 주물냄비에서 밥을 삶았다. 후배들도 기민하게 움직인다. 손은 솜씨 있게 상을 차리고 바쁘게 치우지만 구수한 입담은 끊임없이 오간다.

며느리에게도 가르쳐주지 않을 비법도 마구 쏟아진다. “여름엔 소가 물을 많이 마셔서 고기 맛이 싱거워. 그러니 여름 소고기는 양념구이나 탕이 제격이지.”(오세득), “간장게장 단맛의 비법은 감초를 살짝 넣는 거야.”(노영희)

셰프들의 야식에 술이 빠질 순 없는 법. 이날엔 카베르네 소비뇽 포도로 만든 최고급 와인에 소 혀와 푸아그라(foie gras·거위간으로 세계 3대 진미)로 만든 테린(terrine·재료를 잘게 썰어 낸 전채요리)이 안주로 나왔다.
이야기는 곧 국내 파인다이닝에 대한 진지한 고민으로 이어졌다. 고급 레스토랑을 운영하면 돈방석에 앉을 것 같지만 천만의 말씀. 아직은 파인다이닝에 위화감을 느끼는 이들도 많고 문화가 정착되지 않았다. 꼴불견 손님에 대한 대책도 논의됐다. 노쇼(no show·나타나지 않는 것)로 예약을 펑크 내는 건 적잖은 손님들의 고질병이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지만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다음 번 모임을 기약하며 이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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