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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발언|국민방위군 사건 ⑧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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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51년 7월5일부터 대구 동인국민학교 강당에서 열린 방위군간부들의 부정을 단죄하는 군사군법 회의에는 첫날부터 인파가 밀어닥쳤다.정부도 이례적으로 이 군재를 공개리에 진행시키고 입장못한 수많은 방청객을 위해 교정에 고성능 학성기까지 가설하여 일반에 재판과정을 세세히 알렸다. 비공개를 원칙으로하는 군재를 이처럼 공개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사건에대해 국민여론이 들끓었다는 증거이며 또한 이때문에 세논에 재판이라는 비평도 일부에서 나왔다. 그리고 방위군사령부가 있던 동인학교를 바로 군재장소로 택한것도「아이러니컬」한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다시 군재관계자들의 이야기.
▲김태청씨(당시육군매찰과장·방위군사건수석검찰관=중령·전육군법무감·현변호사·54)검찰을 통하여 수사기관에서 넘어온 조서를 거의 그대로 조사 확인할 수 있었고 또 증거도 충분히 잡았다고 기억됩니다. 그 당시 정계일부에서는 그 많은 돈을 유흥비에만 썼다는 것은 거짓말이고「특정단체」에 정치자금을 댄 것이라고 말이 많았는데 중거가 확실한 극히 일부만 나타나고 나로서는 정치자금관계는 그 이상 캐낼 수 없었습니다.

<기녀들 줍게 현찰마구 뿌려>
부사령관 윤욘희대령은 어지간히 담력이 큰 호걸형의 사나이였던 것 같아요.
6·25직후에 공포시행된『비상사태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이란 길다란 이름의 법안이 있는데 줄여서 『비상지치령』이라고들 했지요. 이에 의하면 6·25와 같은 비상사태하에서 막대한 군수물자를 부정처분한 자는 사형에 처할 수 있게 돼 있는데 헌병사의 의견서도 그 법령을 적용하여 엄단함이가하다는 것이었고 온 세상이 자기를 죽이라고 아우성 인데도 나에게 조사를 받는 윤대령의 태도는 실로 태연자야 그것이었습니다.
별로 건방진 것 같지는 않았으나 『젊은 검찰관이 나를 조사하느라 수고가 많지만 누가 나를 죽일것인가』하는 자신만만한 태도였어요. 조사에 나타난 바로는 막대한 예산은 은행두없는 지방에서 군량·피복동을 현지 조달한다는 이유로 현찰로 전달더;S것이 많았는데, 현찰이 어찌나 많았던지 그것을 가마니에 넣어서 GMC로 수송했고 주둔지에서는 적당한 창고에 부려놓고 보초를 세웠다고 해요.
그들은 그많은 돈을 매일갈이 대인의 금호정이란 요정에서 뿌렸는데 부관이 든올「트렁크」에 가득 넣어서「지프」에 싣고가서 기녀들에게 화대를 줄때도 몇장씩 세어주는것이 아니라, 돈을 손에 잡히는대로 끄집어내어 마구 뿌리면 이것을 한장이라도 더 주워가지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기녀들을 보고 호탕하게 웃어대는 부사령관이었다는 겁니다. 돈을 물쓰듯 한다는 말이 있지만 웬만한 사람은 아마 물도 이사람이 돈 썼듯이는 못 쓸것입니다.
심문을 일단락 지은 어느날 나는 담배를 한개비 권하면서『여보시으, 부사령관. 나는 물이라도 한번 당신이 돈쓰듯 써보았으면 좋겠소』하고 은근히 비꼬았더니 그는 담배를 한모금 빨고나서 『글세올시다.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때 그 돈을 금중령(나)에게도 좀 춰둘걸 그랬지』하며 능청맞은 농으로 받아넘기고는 껄껄웃는 것이 었습니다.

<"월소하연 뭘해" 불신소리>
검찰관에 주어진 20일의 구속기간을 엄수하느라고 진땀을 빼고있는데 항간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들려오던 군욕『국민방위군사건을 군재에 회부한다지만 두고보라구. 정치적으로 흐지부지해 버릴터이니까.』정부를 ALE지않는 국민들의 말이겠지만 어쩌면 군검찰조일부받고있던 부사령관의 저 눙청맞은 농담도 그 이른바 개치적 흐지부지의 신념에서 왔던것인지도 모르지요. 그러한 세간의 풍문이나 피의자의 신념에도 불구하고 나는 법적기한내에 기소하여 사건은 군법회의에 기소됐습니다. 세상은뜻밖이라는듯이 잠시 놀라는 것 같더니다시 『기소나하면 뭐하노? 검찰과 지가 사형이라도 구형할껀가?』 이렇게 수군거리는 사투리가 내 귀에도 들려왔습니다. 온 국민의 이목이 총 집중된 가운데 7윌5일 상오l0시에 역사적인 제1회 공판이 막을 올렸습니다. 예상한 대로 방청인이 쇄도해 임시법정인 동인국민교강당은 초만원을 이루었는데 들어가지 못한 군중들은 운동장과 골목길에서 서성대며 좀처럼 돌아가지를 앉아요. 그래서 결국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마이크」를 장치하여 밖에서 듣기만 이라도 하도륵 해주었지요.
공위은 재판장에고심언봉준장, 심간관에안춘생준장·고리병문준강· 김형DF 준장·법무사 계철정 씨등으르 대구 특유의 무더위슥에서 15일간 날마다 계속됐습니다. 변호인은 김수?·장후영·이병?·전덕·오완수예 씨등 모두 9명이었는데 이들 쟁쟁한 법간선궤들은 검찰관맞은 편에 일렬로 포진하여 번갈아 일어서서 이구동성으로 이 사건에 「비상조치령」을 적용할 수 없다는 법리논을 전개했고 나는 동법을 바로 이런때에 쓰라고 만들어논 것이라고 응수하여 불꽃튀는 논쟁을 벌였습니다. 결국 계철정 법무사는 변호인들의 적용부가논을 중간재정으로 물리쳤지요.
여기서 검찰관의 이야기를 잠시 중단하고 이번에는 변호인과 법무사의 답을 들어보겠다.
▲함질호씨(당시 전윤근 피고의 변호인·현사업·59)<나는 김윤량 사령관과는 6·25 내전에는 술친구였어요. 1·4후퇴로 대전에 내려가 변호사를 개업하고 있는데 하루는 김준강이 별만을단「지프」를 타고 찾아와 방위군에 사건이 생겨 자기생명이 위태로우니 좀 도와 달라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나는 의리로 김씨변호를 무료로 맏게 된거지요. 김이 구속된 후 내가 늘 면회를 다녔는데 만날때마다 참회의 눈물을 흘립니다.
군재는 법연안에 군병들이 권총을 차고 삼엄한 경비를하고 밖에는「마이크」를 달아놓고 완전히 공개재판을 했어요. 나는 첫 공판에서 증인으로 정일권전참무총장과 김일환국방부 제3국장을 신청하고 항변을 했습니다. 즉 여기 앉아 이른 심판관들도 방위군간부들과 똑같은 중범자들이기 때문에 재만할 자격이 없다고 들이 댔어요.

<이기붕·김창룡씨도 방청>
6·25 남침때 국민과 국가의 재산을 최후까지 남아서 지켜야할 군장교들이 먼저 후퇴하고 한강다리를 끊어서 수많은 시민을 죽게했으니 중범자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재판장은 법정을 모욕했다고 퇴장을 명합디다.
헌병 2명이 달려들어 권총으로 위협하며 끌어내려고 하기에 나는 보따리 싸가지고 나와버렸습니다. 다른 변호인들이 합기를 열고 김호변호인이 불참삼하면 자기들도 모두 퇴임하겠다고 항의를 한 모양이예요. 당황한 재판장은 기왕 오늘은 퇴장했으니 내일부터는 나에게 빈룬케 하도륵 하겠다고 타협을 보았어요.
공판때 정일권·김일환 두 증인에게 이 사건에 거항공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관련이 없느냐고 따져 물었더니 모두 완강히 부인합디다.
방청사에는 주적붕 국방이 나와 재만과정을 심각히 지켜 보았어요.나는 김윤량이는 영웅적인 명예욕에서 사령관직에 앉았을 뿐이니까 사형은면해주어야 한다고 했어요. 그러나 이군재는 「여론재판」이라고하자, 「정치재판」이어서 변호인들 변론이 멱혀들어가지 않았지요. 사형선고가 내린후에 김의 부인이 나를 찾아와 울면서 어떻게 남편을 살릴길이 없겠느냐그 했지만 이미 대세는 기울어진 것으로 판단하고 달래어 보냈습니다.

<들 끓는 여론에 사형불가피>
▲계철부씨 (당시고군법합의법무사=소령·전윤북대총장·현변호사· 60) 그때의 군법희의는 미국제도를 그대로 본떠 배심을 채댁했습니다. 재판부는 법률 전문가인 법무사 1명과 배심원 비슷한 심판관4명으로 구성됐는데 모두 군 장성이었어요. 9명의 변호인들은 모두 이름있는 분이었는데 나타난 모든 증거에 의해 범행은 인정되지만 구형이 너무 무겁다고 검찰관과 심한논쟁을 벌였어요. 그리고 김윤근사령관은 내가 보기에도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고 부사령관 윤익헌대령이 모든것을 조종한것도 사실이구요.
재판장은 검찰관의 구현대로 5명의 피고에게 사형을 선고했는데 이같이 극형을 주게 된 것은 당시의 국민여론을 많이 참작한 탓이지 만 공판장에 고성눙「마이크」를 가실한 것 이라든지, 첫 군재결과에 대한 국민감정이 극도로 비등하여 재심군재에서는 그와 같은 선고를 하지않을 수 없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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