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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계 망치는 미꾸라지' 비아냥 딛고 '영웅'이 된 남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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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겨우 1루를 밟았을 뿐이다." 이장석 구단주는 넥센 히어로즈 홈 구장인 목동 야구장에서 자신이 왜 야구에 뛰어들었는지 얘기했다.

이장석 프로야구 넥센 히어로즈 구단주. 이장석이란 이름 세 글자는 최근 한동안 야구계에서 가장 기피하는 단어 중 하나였다. 각종 야구 관련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그를 성토하는 글이 줄을 이었다. ‘먹튀’나 ‘장사꾼’이란 표현은 그나마 양반이었다. ‘사기꾼’이란 수식어도 그의 이름 옆에 늘 따라붙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안정적으로 수익을 창출하겠다던 당초의 호언장담과 달리 자금난에 시달리며 정성훈(현 LG)과 장원삼(현 삼성), 황재균(현 롯데) 등 올스타급 핵심 선수를 다 매각하며 최하위권 성적을 맴돌았으니.

이 구단주가 2008년 히어로즈를 인수했을 때 그의 도전, 아니 그의 도박은 비극으로 끝날 거라고들 말했다. 자금력이 막강한 웬만한 대기업 아니고서는 힘에 부치는 프로 구단 운영을 감히 개인이 감당할 수는 없을 거란 예상이었다. 한편에선 “투자한 수십억원을 날리고 알거지로 야구계를 떠날 것”이라고 비아냥댔지만, 또 한편에선 “컨설턴트 출신이 괜히 손을 댔겠느냐”며 “결국 구단을 거액에 대기업에 넘기고 손 털고 나갈 것”이라며 불쾌해했다.

 하지만 2013년 반전이 일어났다. 넥센 히어로즈가 9개 구단 중 3위라는 호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하며 창단 후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거다. 올해는 한국시리즈까지 올라왔다. 야구 커뮤니티 게시판에는 그의 뛰어난 운영능력을 칭찬하는 글들이 줄을 이었다. ‘빌리 장석’(영화 ‘머니 볼’ 실존 모델인 미 프로야구 오클랜드 어슬레틱스 빌리 빈 단장 이름을 딴 애칭)이란 별명까지 붙여줬다. 불과 2~3년만에 그를 대하는 태도가 180°달라진 것이다.

 문득 궁금했다. 그는 정말 왜 야구판에 뛰어들었을까. 그리고 그는 행복할까. 다음은 일문일답.

 
-잘 나가던 컨설턴트가 왜 프로야구단을 인수했나.

 “돌이켜보니 운명 같다. 2007년 현대유니콘스가 모기업 사정으로 공중분해 될 예정이었다. 대기업 아니면 살 데가 없는데 살 만한 KT나 STX 등이 모두 인수 제안을 거절했다. KBO가 너무 막막하니까 아무 줄이나 잡은 거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프로야구에 아무 끈도 없는 나한테까지 왔겠나. 3일 고민하다 인수하기로 결심했다. 미국이면 혹시 모를까 한국처럼 대기업이 운영하는 프로 야구계에 발을 들여놓을 줄 몰랐다.”

※넥센 히어로즈 공식 팀명은 서울 히어로즈다. 히어로즈는 국내 최초로 기업이 아닌 개인이 소유한 프로 야구단이다. 현대 유니콘스가 모기업 사정으로 해체된 후 이 구단주가 KBO(한국야구위원회)에 가입비 120억원을 내는 조건으로 인수했다. 그는 국내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네이밍 스폰서’라는 제도를 도입해 창단 첫해인 2008년 우리담배와 스폰서십을 맺었다. 구단 명칭에 우리담배 이름을 붙이고 3년간 300억원을 받는 조건이었다. 그래서 당시 이름은 우리 히어로즈였다. 그러나 이후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우리담배와 히어로즈 사이에 가입비 미납으로 인한 갈등이 생기더니 결국 우리담배가 그해 말 부도났다. 2009년 히어로즈는 스폰서 없이 뛰었다.

-당시 대기업도 ‘밑빠진 독’이라고 손사레쳤다. 무슨 배짱으로.

 “가능성을 봤다. 한국 프로야구는 산업화가 안돼 있다. 자생력이 없으니 구단을 갖고 있는 대기업이 보조를 해줘야 살아가는 구조다. 내 눈에 산업화 가능성이 보였다. 이왕이면 미국의 뉴욕 양키스나 보스턴 레드삭스처럼 구단 만으로 수익을 내는 성공적 모델을 만들고 싶었다. 그 구단도 개인 구단주다.”

넥센의 박병호 선수(오른쪽)와 이장석 구단주

-그게 전부인가.

  “의지는 머리에서 나오지 않는다. 가슴이 중요하다. 국내에서 가장 인기많은 프로 스포츠의 구단주가 된다는 건 정말 매력적이다. 뉴욕 양키스의 할 스타인브레너나 댈러스 매버릭스의 마크 쿠반 같은 구단주를 봐라. 남자는 누구나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꿈이 있지 않나. 내가 30대 초반에 투자은행에서 일했을 때 연봉이 수십억원이었다. 미국이나 영국 젊은이들이 돈을 벌면 꾸는 꿈이 있다. 연봉이 백만 달러면 포르셰 하나 빼고, 천만 달러 벌면 요트나 여름별장 사고, 1억 달러를 손에 쥐면 프로 구단 지분을 사는 거다. 나도 돈 모으면 미국 마이너리그팀 지분을 10~20% 정도 사겠다고 꿈꿨다. 그런데 프로야구 구단주가 되는 기회가 왔다. 수시로 유명 선수와 만나고 감독과 경기 이야기를 나눈다. 이걸 왜 놓치겠나.”

-일부에서는 시장이 안좋을 때 헐값에 사들였으니 차익을 남겨 다시 팔 거라고 말한다.

 “몇 조원이라면 몰라도 몇 백억원은 나에게 큰 의미가 있는 돈이 아니다. (이 구단주는 1990년대 중국 항공사에 기내지와 기내 영상을 납품하는 사업으로 큰 돈을 벌었다) 그건 나라는 사람을 모르고 틀린 가정에서 추측을 한 거다. 내 나이가 이제 50인데 그 정도의 돈을 위해 내 이름 석자에 먹칠을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프로구단 구단주 명함이라는 게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모르고들 하는 소리지. 예를 하나 들어보자. 프로야구단이 하나 생기려면 기존 9개 구단이 만장일치로 동의해야 한다. 내가 반대하면 아무도 프로야구단을 만들 수가 없다. 이건 1조원으로도 살 수 없는 가치다.”

-자금난에 허덕이며 핵심 선수를 팔았다. 그래서 욕도 많이 먹었다. 그럴 때 후회했을 법도 한데.

 “공포는 있었지만 후회는 없었다. 공포에 휩싸이면 후회할 겨를이 없다. 구단 운영비로 빌린 돈을 갚지 못해 감옥에 가는 그림이 그려졌다. 최악의 상황이 오면 죽음으로 갚겠다고 생각했지만 탈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가장 힘들었던 건 재정문제가 아니다.”

-그게 뭔가.

 “나를 이질적인 존재로 보는 거였다. 이상한 놈, 들어오면 안 됐을 놈, 신성한 프로야구계를 더럽히고 망치는 미꾸라지…. 갑자기 야구계의 공적이 됐다. 다들 내가 빨리 망해서 야구계에서 떠났으면 했다. 우호적으로 손을 내미는 데가 하나도 없었다. 하루하루 언론도 무섭고 두려웠다. 한 번이라도 대금 결재가 늦으면 곧장 기사가 쏟아졌다. 2009년 6월 한 언론에서 ‘히어로즈 망할 거다, 곧 부도 난다’는 기사가 나서 그 다음날부터 대금 결제가 한꺼번에 쇄도해 무척 고생하기도 했다. 야구계의 넘버원 에너미(제1 공적)로 내몰리니 참 힘들더라. 2012년까지 5년간 그렇게 버텼다. 그동안 차라리 감옥에서 5년 사는 게 이것보다 편하겠다 싶었다.”

-지금까지 히어로즈에 얼마나 투자했나.

 “내 개인 돈 100억원 정도. 나머지는 입장료 수입, 스폰서 기업과 은행 등에서 빌린 돈으로 꾸려가고 있다. 처음에는 곧 부도 날 거라면서 아무도 돈을 안 빌려주려고 했다. 요즘은 구단 성적이 좋아서 그런지 잘 해준다.”

-이제는 어느 정도 어두운 터널을 지났다고 보는 건가.

 “솔직히 여전히 힘들다. 예전에는 전략가의 책을 즐겨 읽었는데 요즘은 일본 전국시대를 다룬 책을 주로 본다. 일본 다이묘(영주)들은 지면 일족이 몰살됐다. 역사적으로 그런 경우가 드물다. 그래서 그들은 죽을 각오로, 삶을 걸고 정치를 했다. 나도 그렇게 구단 운영에 대해 모든 걸 걸고 한다. 항상 내일이 가장 힘든 순간인 것 같다.”

1) 용산고 1학년 재학 시절이던 1982년 친구들과 함께(왼쪽에서 둘째). 2) 1989년 연세대 금속공학과 졸업식(왼쪽에서 둘째). 3) 1997년 프랑스 인시아드 유학 시절(앞줄 왼쪽에서 셋째).

-부친(이기홍)이 1950년대에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에서 근무한 후 경제기획원 초대 차관보를 지냈더라. 어떤 분인지 궁금하다.

 “아버지는 박정희 대통령 당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설계했다. 경제기획원 초대 기획국장으로 시작해 차관보까지 지냈다. 장면 정부 때도 비슷한 계획을 입안했는데 당시엔 ‘관(官) 주도 계획개발경제는 공산주의’라며 싫어했다더라. 서울대 영문과를 나와 미국 애머스트 대학에서 공부하다 거기서 IMF에 취직했다. 그 뒤 한국은행에 스카우트돼 왔다가 경제기획원 전신인 부흥부에도 근무했다. 경제학자면서 고급 관료(bureaucrat)였다.”

-잘 살았겠다.

 "맞다. 부족함 없이 자랐다. 1972년부터 서울 서초구 구반포에 살았다. 거긴 그 때도 부자동네였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가장 큰 평수인 82동(139㎡·42평)에 살았다. 차를 가진 집이 딱 둘이었는데 그중 하나가 우리집이었다. 지금은 동부이촌동 살지만 나름 강남 원주민이다. 1988년까지 강남에 살아서 강남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다 기억에 남아있다.”

-강남 원주민이 왜 용산고를 다녔나.

 “그러게 말이다. 강남 8학군에서 다니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꼬여 4학군으로 밀렸다. 내가 반포중 5회인데 당시 구반포 사는 반포중 학생은 서울고나 상문·휘문·경기고로 배정받았다. 그런데 우리 때 갑자기 일부가 중경고·용산고 같은 용산구 학교로 배정됐다.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학교에서 ‘명문’이라며 정신 교육을 단단히 시켰는데 실제로는 폭력사건이 빈번하게 벌어지는 야성 넘치는 학교였다. 그전에 없던 ‘깡’이나 ‘헝그리 정신’을 여기서 체득했다. 결과적으로는 강북 학교가 인생을 살아가는데 좋은 경험을 했고 더 많이 배운 것 같다.”

-그런데도 연세대에 갔다.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과외 받았다. 선행학습 덕분인지 반포중에서도 공부 잘했다. 그 때는 반포중 상위권이 전국 탑클래스였다. 다른 고등학교에 간 반포중 친구들 다 공부 잘해 좋은 대학 갔다.”

-프랑스에서 MBA를 땄던데.

 “대학 졸업 후 중국 항공사에 기내지와 기내 영상을 공급하는 사업을 했는데 경영 지식이 필요하더라. 그래서 MBA를 땄다. 미국 학교도 몇 군데 붙었지만 앞으로 미국에서 살 기회는 있어도 프랑스에서 살아볼 기회는 없을 것 같아 인시아드를 선택했다. 미국보다 프랑스가 더 멋있지 않나. 내가 좀 낭만적인 데가 있다.”

-형제가 있나.

 “누나만 셋이다. 아버지도 나도 외아들인데, 나는 또 45세에 늦둥이 아들을 봤다. 아들 귀한 집이랄까. 큰 누나는 캐나다에서 석유회사를 갖고 있다. 웬만한 재벌 이상으로 잘 산다. 둘째, 셋째 누나도 미국에서 상당히 규모가 큰 IT기업을 운영한다. 여기서 말하는 재미교포의 성공 수준을 훨씬 넘는다.”

-구단이 망할 위기에 처하면 가족 도움을 받으면 되겠다.

 “자기 일은 각자 알아서 하는 분위기다. 스폰서가 부도나서 가장 어려웠던 2009년에도 손벌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런 걸 굉장히 강조하신 분이다.”

-가족은 야구단 운영에 찬성했나.

 “아내가 ‘꼭 성공하라’고 응원해줬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항상 지지해주고 있다. 가족이 우리 구단의 가장 큰 팬이다. 초등학교 다니는 딸은 히어로즈를 무척 좋아한다. 거의 모든 시합을 다 챙겨본다. 항상 지던 초창기에는 ‘아빠, 우리는 왜 지는거야’라며 울 정도였다.”

글=유성운 기자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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