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활동 형태와 각국 실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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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소련이 3천5백여명의 KGB요원을 보낸다고 해서 미·영·불 등이 마냥 당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CIA(미국) DI(영국) BND(서독) 동도 007식의 요원들을 세계 구석구석에 보내고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막강의 실력을 가진 것은 미 CIA. 1만5천명의 직원과 연 5억「달러」의 풍부한 예산으로 세계의 정치정세를 「사찰」하고있다.
이들은 「크렘린」궁 안에서의 대화까지 도청해 내며 동구의 지도자 가운데 누가 언제쯤 실각할 것인가를 정확히 맞혀낸다.
그러나 미국이 이러한 정보기관을 가진 것은 극히 최근. 일본의 진주만 기습 직후 OSS(전략 첩보국)를 창설한 게 처음이었다. 20년대 후반에 국무장관을 지냈던 「스팀슨」씨는 국무성에서 외국 대사관들의 암호교신 내용을 분석한다고 듣자 『신사는 남의 서신을 훔쳐보지 않는 법』이라면서 폐지하기까지 했었다. 말하자면 미국이 대규모의 정보기관을 가진 것은 2차대전 이후의 일이었다.
CIA라고 해서 언제나 백발백중으로 맞히는 것은 아니다. 「카스트로」를 타도하기 위해「피그」만으로 쳐들어갔다가 거의 전멸 당했던 일, 「흐루시초」의 실각 및 「베를린」 장벽 구축계획 까맣게 몰랐던 일 등은 CIA 망신 사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항목이다.
그러나 CIA의 신출귀몰한 정보활동은 가끔씩 있는 이런 실수에도 불구하고 「세계 정보계의 왕자」다운 업적을 수없이 남겼다. 남미와 동남아에서 일어났던 반미정권에 대한 「쿠데타」는 거의 예외 없이 이들의 입김을 받으면서 이뤄졌던 것이다.
이 가운데서 CIA 스스로도 경탄한 업적이 소위 「펜코프스키」사건. 이것은 서독의 KGB 총책이었던 「에브제니·런지」대령을 「모스크바」에서 빼어온 극적 사건이었다.
CIA는 가끔 영국의 DI나 서독의 BND에 비해 질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는다. 방대한 예산으로 물 쓰듯이 돈 쓰는 법을 빼면 DI나 BND보다 오히려 기술이 모자란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이것은 미국의 정보활동 「시스팀」을 잘 모른데서 나온 속단이다.
미국의 정보활동은 CIA 혼자서 모두 하는 것이 아니다. 핵 관계정보는 원자력위, 암호 및 군사교신 해독은 국가안보위, 정치·경제문제는 국무성 하는 식으로 모두 나눠서 하기 때문에 CIA는 이러한 문제 이외의 것만 다룬다. 이 모든 경보기관의 정보요원을 합하면 10만명 이상으로 추측되며 예산도 35억「달러」에 이르는 것이다.
예산과 인원수에 비해서 가장 우수한 정보활동을 보여주는 것은 「이스라엘」. 이들은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 연설을 CIA보다 앞서 캐냈으며 67년 「6일 전쟁」 때는 「이집트」의 병력배치 상황을 당사자보다 더 훤히 알고있었다.
기습공격을 시작할 때 어느 조종사가 어느 식당에서 무엇을 먹고 있는지까지 속속들이 알았을 정도였다. 이에 반해 영국은 오랜 전통과 경험으로 한몫본다. 이번의 추방소동도 따지고 보면 KGB의 모든 족보를 캐낸 DI의 활동 덕분에 가능했으며 미·불·서독 등이 『증거가 없어서 계속 내버려두는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하지만 노대제국의 기력으로는 도저히 풍부한 예산을 쓸 수가 없어서 계속 고전 중이라는 평.
미·영에 비해 서독은 입지조건이 퍽 좋은 것으로 얘기된다. 「나치」시대의 우수한 요원이 있으므로 인적자원이 풍부하고 KGB가 특히 득실거리므로 실전의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나치」의 유물을 쓸리 있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몇 달 전까지 BND를 지휘하던 「라인할트·겔린」도 바로 「나치」 비밀경찰 출신이었다. BND는 특히 동구 공산국 사정에 정통하며 소련의 「체코」침공, 「헝가리」 진주 등을 정확히 예언한 경력이 있다.
그러나 BND는 세계 첩보활동 사상 가장 큰 망신을 당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67년 서독에 와있던 소 KGB 요원 3명이 NATO군 기지에서 「사이드·와인더」공대공 「미사일」을 훔쳐낸 사건이다.
길이 3m가 넘는 「미사일」을 멀쩡하게 도둑맞자 BND는 CIA의 협력을 받으며 명예를 걸고 싸웠으나 역부족. 바로 서독 민간항공기 편으로 「모스크바」까지 실어다준 것을 엉뚱한 데만 쑤시고 다녔던 것이다. 게다가 문제의 「미사일」이 「덴마크」에서 비행기 회사의 착오로 서독에 되돌아 왔다가 재차 나갔음이 밝혀져서 『BND 두 번 망하다』라는 유행어까지 나왔었다.
정보활동을 하다보면 이런 실수가 심심찮게 뒤따르는 법. BND를 「녹·아옷」시킨 KGB도 비슷한 망신을 여러 번 당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69년의 「레바논」 사건.
「프랑스」제의 「미라지」 「제트기」가 「이집트」에 보낸 소제 「미그」기를 여지없이 격파하자 KGB에 엄청난 주문이 내려왔다. 「미라지」기 한대를 가져오라는 것.
생각 끝에 짜낸 것이 「레바논」의 공군 조종사를 매수, 「미라지」기를 몰고 소련으로 도망치도록 한다는 계획이었다.
값은 2백만「달러」. 그러나 매수될 듯하던 조종사가 자기 상관에게 보고하는 바람에 돈만 날리고 국교까지 위험하게 만들고 말았다.
정보활동에는 이와 같은 「매수 공작」외에 미인계와 술이 꼭 따르기 마련. 2차대전의 요화 「마타·하리」와 이번의 영국사건은 미인계의 전형적 예이지만 「술 먹이기 작전」도 자주 이용된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기록으로는 「술 먹이기 작전」에서 경천등지 할 만한 사건이 터진 적은 한 번도 없다. 워낙 철저히 훈련받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프리카」에 파견되었던 한 CIA요원이 틀림없이 KGB 요원으로 보이는 소련인을 상대로 이 작전을 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 그의 보고에 의하면 『그가 고주망태가 될 때쯤엔 나도 인사불성이 되기 때문에 설사 정보를 내뱉었다 해도 술이 깨면 모두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외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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