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가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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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에게는 세상이 슬픔이며, 느끼면서 사는 사람에게는 즐거움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세상을 보면서 사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새로움이며 기쁨이다.
봄철에는 꽃이 피어 좋고, 여름에는 바다가 있어 좋다. 꽃이 피어 좋은 까닭은 봄철이 꽃마다 다른 온갖 색들로 산과 들을 아름답게 꾸미기 때문이며, 바닷가 있어 좋은 까닭은 여름철이 빠져버리고 싶도록 검푸른 바다로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가을철에는 열매가 익어 좋고, 겨울철에는 눈이 있어 좋다. 열매가 익어 좋은 까닭은 가을철이 가지마다 맛 다르게 익은 크고 작은 열매들을 늘리기 때문이며, 눈이 있어 좋은 까닭은 겨울철이 온갖 것들을 덮어주는 끝없이 새하얀 눈밭들을 펼쳐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철 따라 다른 다채로운 색상과 변화 많은 형상 때문에 자연은 언제나 예술가의 눈길을 사로잡는 영감의 근원이었으며, 그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갖가지 생명들은 보는 이의 마음을 새로움과 놀라움과 믿음의 세계에로 이끌어간 기쁨의 근원이었다. 보면서 사는 사람에게 자연은 그대로 새로움이며 기쁨이다. 그의 새로움과 기쁨이 어찌 자연에서 뿐이랴.
도시의 온갖 번거로움도 보면서 사는 사람에는 경쾌한 직류들의 교향악이며, 굽이치는 거대한 곡선들의 약동이며, 번쩍이는 색채의 원시림이다.
그에게 도시는 인공이 이룩한 선과 형과 색의 거대한 조형품이며, 그것에서 발견하는 끊임없는 새로움과 기쁨의 근원이다. 마찬가지로 한적한 시골 초가지붕에 널린 빨간 고추도, 처마에서 대롱거리는 하얀 박도, 가을 길을 출렁이는 황금의 물결들도 모두 그에게는 볼수록 새롭고 그윽한 인정의 근원이다. 날카로운 직선과 반듯한 면들이 엮어내는 도시의 빈틈없는 짜임새와 느른한 곡선에 일그러진 형상들이 범벅이 되어 엮어내는 시골의 구수한 맛의 대조. 그래서 보고 사는 사람에게 시골은 언제나 그리운 인정의 샘인가보다.
이제 다시 찾아온 가을. 가을철에는 열매가 익어 좋고 국화향기가 그윽하여 좋다. 그러나 우리의 가을철은 연거푸 열리는 각종 미술전람회의 풍성함이 있어 더욱 좋다. 전시장마다 가득 찬 채색들의 짙은 냄새, 번쩍이는 색광들. 혹은 구상, 혹은 추상의 경향으로 다루어진 천태만상의 인간상과 환경들. 그 많은 재료들과 익숙한 솜씨들. 이렇게 전시장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사는 사람이 우리의 이웃에 있다는 사실은 생각할수록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보기 위해 살고 보이기 위해 사는 미술가들. 우리는 이들의 눈을 통해 아름다운 자연과 인정을 보다 아름답게 볼 수 있고, 이들의 솜씨를 통해 흔한 재료와 기법에서 새로움과 기쁨을 찾는 안목을 배운다. 보면서 생각하는 새로움을 보면서 느끼는 기쁨을 이 가을의 선물로 모든 사람들에게 드리고 싶다. <유근준 미술평론가·서울대오대조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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