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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엘 시스테마' 이끄는 금난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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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지휘자 금난새씨가 지난달 14일 충남 서천에서 유라시안·농어촌희망청소년오케스트라(KYDO) 단원 300명이 참여한 합동연주회를 이끌며 부드러운 선율로 가을밤을 물들이고 있다. [뉴시스]

전남 해남읍에서 완도로 이어지는 13번 국토 초입에 사는 중학생 김장윤(15)군에겐 꿈이 하나 있다. 8년 전 불치의 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같은 환자를 살려내겠다는 마음이다.

 김군은 오케스트라단 경력 6년차의 오보에 연주자다. 올 8월에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농어촌희망청소년오케스트라 합동연주회’에서도 실력을 뽐냈다. 그는 단원 200명과 함께 브람스 대학축전 서곡부터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까지 두 시간 동안 7곡을 소화해냈다.

 6년 전 엄마 손에 이끌려 이 지역 ‘땅끝오케스트라’를 찾았을 때만 해도, 그는 남 앞에 서기를 부끄러워하고 매사에 자신감도 없는 아이였다. 이제는 달라졌다. 해남 인근에서 자기 또래 중에 오보에를 불 수 있는 유일한 중학생이라는 점을 자랑스러워한다. 자부심이 생기니 학교 생활도 바뀌었다. 반에서 중간을 돌던 성적이 최근엔 상위 10% 안으로 뛰어올랐다. 오케스트라가 김군에게 ‘힐링 캠프’가 된 셈이다.

 김군의 지휘자는 금난새(66)씨다.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인천시향을 이끄는 그 금난새다.

 김군의 지휘자가 금난새인 연유는 이렇다. 김군이 속한 해남 땅끝오케스트라가 전국 조직인 농어촌희망청소년오케스트라(KYDO:Korea Young Dream Orchestra)의 전국 20개 지역 오케스트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금씨는 2011년 KYDO가 창단됐을 때부터 오케스트라의 총감독 겸 지휘자다. KYDO는 마사회가 후원하는 농어촌희망재단에서 기획한 농어촌청소년 대상의 오케스트라. 남미 베네수엘라의 빈민층 아이들을 위한 오케스트라 ‘엘 시스테마’가 롤 모델이다.

 재단은 문화생활에 소외된 농어촌 청소년들을 위해 전국 20개 군(郡)에 오케스트라를 창설하거나 기존 조직을 모아, 그 연합체인 KYDO를 금씨에게 부탁했다.

고향 해남 송호리해수욕장에 모인 땅끝오케스트라의 현악기 파트 단원들. [사진 땅끝오케스트라]

 금씨는 지난해 1월부터 제자들과 함께 전국 20개 군 지역을 돌며 ‘금난새와 함께하는 정기연주회’를 열고 지역 KYDO의 초·중·고등학생 단원들을 가르치고 있다. 군민회관에서 KYDO 소속 지역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이들에게 음악의 정신과 이론을 가르친다. 매년 여름 한 차례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여는 합동연주회는 KYDO 활동의 백미(白眉)다. 각 지역 KYDO 오케스트라에서 10명씩 선발된 아이들 200명을 모아 여는 연주회다.

 지휘자 금난새는 바쁘다. 굳이 KYDO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올해 우리 나이로 67세의 적지 않은 연령임에도,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최고경영자 겸 예술감독, 인천시향 지휘자, 창원대 석좌교수에 최근엔 서울예고 교장까지 맡았다. 전국 대학 아마추어오케스트라 연합인 한국대학생연합오케스트라(KUCO)도 그에게 지휘를 부탁했다.

 세계적 오케스트라와 대학생, 농어촌청소년오케스트라의 지휘자를 오가는 그를 보면 2008년 배우 김명민이 열연했던 TV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오케스트라 지휘자 강마에가 떠오른다. 드라마 속 지휘자 강마에 역시 세계적 지휘자이지만 소도시의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를 이끈다. 전국의 KYDO 단원 1000명 중에는, 드라마에서 꽃미남 배우 장근석이 연기했던 악보도 읽을 줄 모르면서 트럼펫을 사랑하고 연주했던 강건우와 같은 꿈 많은 소년도 있을 것이다.

 지난 18일 서울 흥인동 충무아트홀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그와 인터뷰 약속을 잡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많은 직함이 증명해주듯, 그는 분초를 쪼개서 산다. 대개 여유롭게 점심을 먹을 시간인 낮 12시20분에 어렵사리 약속을 잡았다.

 - 어떻게 농어촌 초·중학생으로 구성된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게 됐나.

 “2010년인가, 마사회 산하 농어촌희망재단 이진배 단장이 불쑥 찾아왔다. 문화활동을 접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은 농촌에 문화예술계의 재능나눔이 꼭 필요한 상황이라면서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처럼 우리나라 농어촌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바쁜 생활 중이었지만,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내 음악이 추구하는 게 바로 그런 것이다.”

 - 그래도 농어촌 아이들의 세종문화회관 공연은 불가능에 가까운 기획처럼 생각되는데, 누가 어떻게 구상했나.

 “나와 유라시안필하모닉 단원들의 아이디어다. 농어촌 아이들을 초청해 서울 구경을 시켜주는 일은 흔히 있지 않나. 하지만 이들을 불러모아 세종문화회관 메인홀에서 직접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연주할 수 있게 한다면 얼마나 더 감동적이겠나. 아이들이 구경꾼이 아닌 주체가 되는 거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꿈을 이뤄 나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것이다.”

 - 아이들이, 그것도 정규 클래식 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전문음악인도 쉽지 않은 연주를 한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요리사가 재료에 대해 투덜댈 수도 있지만, 어쨌든 가진 재료로 맛있게 음식을 만들어 내는 게 요리사의 중요한 역할 아닌가. 좋은 재료, 좋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건 쉬울 수도 있다. 아이들이 즐거우면서 잘 연주할 수 있게 하는 게 지휘자의 몫이다. 물론 시스템도 있다. 지역 KYDO의 지휘자 20명을 대상으로 1년에 두 차례 세미나를 열고 있다. 이들이 미리 정해진 곡을 아이들에게 연습시킨다. 또 서울에서 합동연주회를 하기 전에 아이들이 4박5일 동안 합숙하면서, 하루 종일 나와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대학생연합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지도를 받는다.”

 지휘자 금난새는 KYDO에 관한 한 겸손하지 않았다. 질문에 대한 답은 거침이 없었고, 인터뷰 중간중간 넘쳐나는 자신감을 토해냈다.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일가를 이룬 정상의 음악인에겐 이런 경우 겸손을 크게 기대하지 않아도 좋을 듯했다. 그의 자신감은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겐 에너지이고, 관중에겐 감동이 된다.

 - 당신은 어떤 음악인인가. 누군가는 ‘너무 많은 곳에서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하기도 한다.

 “얼마 전에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동대문시장에서 연주를 했다. 시장 바닥에 앉은 상인들이 너무 좋아했다. 그들은 100년 동대문시장 역사에서 지금껏 한 번도 오케스트라가 온 적이 없었다고 했다. 우리 단원 60명은 시장에서 연주한다고 해서 결코 대충 하지 않았다. 베를린필하모닉오케스트라에서나 시장에서나 똑같이 전력을 다한다. 나에게 음악은 이런 것이다. 전문음악홀이나 비싼 티켓 값을 치르는 클래식 애호가에게만 둘러싸여 있기보다는 사회와 호흡할 수 있어야 한다. 그때 음악도 생명력이 느껴진다.”

 그는 일본 사례를 들었다. 도쿄에서는 12월이 되면, 15개의 오케스트라가 베토벤 교향곡 9번을 각각 20번씩 연주한다고 한다. 12월의 도쿄에는 300회의 베토벤 교향곡 연주회가 열리는 셈이다. 아무리 큰 도시라 하더라도 한 달 30일 동안 300회의 연주회를 수용할 수 있을까. 비결은 도쿄 시내의 수많은 회사 사내 강당이다. 교향곡을 전문홀이 아닌 어디에서라도 연주하고, 또 그런 연주회를 듣는 문화가 형성돼 있는 나라가 일본이라는 말이다. 일본은 1920~30년대에 오케스트라가 일본 전역의 시골학교를 다니며 연주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클래식을 듣고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기업체 사장이 되니 가능한 일이란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KYDO도 이런 씨를 뿌리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 베를린 필하모닉오케스트라부터 KYDO까지 다양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데, 본인에게 가장 소중한 오케스트라는 어느 것인가.

 “KYDO는 당연히 수준이 낮다. 하지만 그간 내가 지휘한 수많은 오케스트라 중 최고의 감동을 느꼈다. 문화에 소외됐던 농어촌 아이들이 이런 걸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나. 나는 KYDO에서 한국의 미래를 위한 지휘를 하고 있다.”

 금난새는 KYDO를 솔리스트 음악가를 육성하기보다는 음악과 함께 성장하는 건강한 시민의 자질을 함양하는 음악교실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인터뷰를 마친 기자에게 “내년에 작지만 쉽지 않은 바람이 있다”고 밝혔다. 전국 1000명의 KYDO 단원을 모두 모아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합동연주회를 여는 것이다. 오케스트라를 수용하는 데 한계가 있는 세종문화회관 시설 때문에 그간 각 지역 KYDO에서 10명씩만 선발해 무대에 올렸는데, 서울 무대에 서지 못한 800명의 아이들이 늘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엘 시스테마=1975년 베네수엘라의 경제학자이자 음악가인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 박사가 빈민가 차고에서 청소년 11명으로 오케스트라를 만들면서 시작됐다. 마약·폭력에 노출된 빈민가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쳐 책임감과 꿈을 길러주는 프로젝트다. 2008년 ‘기적의 오케스트라, 엘 시스테마’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최준호 기자

"시골 아이들 1000명 데리고 서울광장 콘서트 여는 게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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