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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틴경제] 리니언시가 뭔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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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0면

[일러스트=강일구]

Q 최근 국회 국정감사에서 ‘리니언시’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간에도 신문·TV에서 자주 접한 말이기도 합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법을 위반한 기업을 제재하면서 과징금을 깎아주는 방법으로 쓰인다는 얘기로 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던데, 잘못한 기업에 벌을 주겠다면서 깎아주는 건 또 뭔가요?

A 우선 리니언시(leniency)의 사전적인 뜻부터 찾아보겠습니다. 영어사전에는 ‘관대·관용·너그러움·자비, 관대한 행위…’로 설명해 놓았군요. 단어 뜻을 적용해 보면 ‘잘못한 기업에 관용을 베푼다’는 말이군요. 공정거래위원회는 리니언시를 ‘자진신고 감면제도’라고 번역합니다. 흔히 카르텔이라고 불리는 담합에 참여한 기업 또는 기업인이 해당 사실을 신고한 경우 시정조치나 과징금 등의 제재를 약하게 해주거나 또는 면제해주는 제도입니다. 이유는 사실 ‘고육지책(苦肉之策)’에서 나온 겁니다.

 기업 간 담합이 갈수록 교묘하고 은밀하게 이뤄지고 있어, 수사권이 없는 공정위로서는 조사가 쉽지 않습니다. 담합의 현장을 적발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고, 요즘은 e메일이나 카톡 같은 소셜미디어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은밀하게 담합을 모의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특정기업의 담합 혐의를 잡고 현장조사에 들어가더라도, 출입을 막고 자료를 폐기하는 등 조사방해 행위를 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이 때문에 공정위는 담합을 적발하고 재발을 방지하는 수단으로 일종의 자수제도를 운영하는 겁니다. 담합에 참가한 기업 중 한 곳으로부터 직접 증거를 제출받으면,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사건처리가 가능합니다.

또 리니언시 제도가 있으면 담합을 해온 기업 중 누군가가 자수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서로 믿지 못하게 되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담합 없이 영업활동을 하게 됩니다. 만약에 자진신고 제도가 없다고 가정한다면, 공정위가 담합을 적발·처벌하더라도 일정기간이 지나면 또 담합이 생겨날 가능성이 커지게 마련입니다.

가장 먼저 자수하면 과징금 100% 면제

 공정위가 이 제도를 도입한 것은 1997년입니다. 공정위가 특정기업이 법을 어겼다고 판단될 경우, 현장 직권조사를 나가게 되는데, 처음엔 자신신고한 1순위 기업에 대해서만 제재조치를 감경 또는 면제해주는 제도를 도입했지요. 그러다가 4년 뒤인 2001년에는 ‘조사 시작 이전’이라는 요건과 자진신고자 수에 대한 제한을 폐지하게 됩니다. 2001년 전까지라면 조사가 이뤄지기 전 가장 먼저 자수한 기업 한 곳만 벌을 덜어줬지만, 이후엔 조사가 시작된 이후라도 둘째 기업까지 ‘자수의 혜택’을 볼 수 있게 됐습니다.

 다만, 공정위의 직권조사 실시 이전에 기업이 자진신고를 할 경우 과징금의 75% 이상을 깎아주지만, 이후에 자진신고를 하면 50% 이상으로 한도가 내려갑니다. ‘짬짜미를 해봐야, 너희 중 누군가는 배신할 수 있다. 그러니 조사 나가기 전에 미리미리 자수하라’는 얘기죠.

 공정위는 2005년 다시 리니언시 제도를 손봅니다. ‘제도의 투명성과 예측가능성을 높일 수 있도록 획기적으로 개선했다’는 게 공정위의 설명입니다만, 기존 리니언시 제도의 허점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기 때문입니다. 우선 조사 전후에 관계없이 1순위 자수에 대해서는 모두 과징금을 100% 감면해줍니다. 하지만 2순위에 대해서는 오히려 30%만 감면하도록 했습니다. 자수 1, 2순위 간 혜택의 격차를 벌려 자수에도 경쟁을 하도록 유도한 거죠. 또 자진신고의 기회를 놓친 사업자가 다른 담합 건을 최초로 자수할 경우에도 원래 조사 중이던 담합 행위에 대해서 일정부분 감면혜택을 주도록 했습니다.

리니언시 도입 뒤 담합사건 적발 늘어

 이후에도 리니언시 제도는 계속 조금씩 바뀝니다. 생존경쟁을 위해 담합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일부 기업들이 자꾸 제도의 허점을 파고들자 제도 역시 계속 진화한 거죠. 2007년에는 자진신고 2순위자에 대한 과징금 감경률을 기존 30%에서 50%로 상향 조정합니다. 강요자에 대한 감면제한은 다시 살립니다. 2009년엔 2개 이상의 회사가 실질적인 지배관계에 있는 경우 공동 자진신고도 허용해 줍니다. 2012년 1월에는 상습 반복적으로 담합한 기업에 대해서는 감면혜택을 제한하도록 했습니다. 담합으로 제재조치를 받은 뒤 5년 안에 다시 담합을 하거나, 감면혜택을 받은 후 5년 내에 다시 새로운 담합을 한 경우 감면혜택을 제한하는 겁니다.

 2012년 6월에는 담합 제재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일부 2순위자의 감경을 제한하도록 했습니다. 2개 사업자가 가담한 카르텔에 대해서는 1순위 신고자에 대해서만 현행대로 100% 면제를 인정하고, 2순위는 감경을 해주지 않는 겁니다. 두 기업이 담합했다가 A기업이 먼저 자수하고, B기업도 이후 자수할 경우 당시 제도라면 담합에 대한 처벌 자체가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또 3개 이상 사업자가 가담한 담합의 경우, 1순위 신고일로부터 2년을 넘어 지각 자수하는 2순위자에 대해서는 벌칙에 대한 감경을 해주지 않기로 했습니다.

 공정위 송상민 심판총괄담당관은 “한번 자진신고가 있었던 같은 품목에서 그 이후에 담합이 다시 형성돼 공정위가 재적발하는 사례는 찾기 어려워졌다”며 “자진신고제도는 바로 이런 효과를 노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연도별 과징금 부과 건수를 보면 리니언시 제도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1999~2004년 동안 연평균 과징금 부과 건수는 13건이었는데, 2005~2012년에는 연평균 27.5건으로 늘어났습니다. 증거확보가 쉬워지고 이 때문에 사건 처리기간이 단축되면서 담합 사건의 연간 처리실적이 늘어났다는 게 공정위의 설명입니다.

 리니언시 제도는 우리나라만 하고 있는 제도가 아닙니다. 미국·일본과 유럽연합(EU)의 여러 국가 등 세계 40여 개국에서 이 제도를 도입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 기업 간 담합 사건에 공정위 외에 검찰과 미연방수사국(FBI)도 동원하고 있지만, 90% 이상의 사건이 리니언시를 통해 처리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 같은 세계적 추세에도 불구하고 리니언시 제도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습니다. 자진신고하거나 조사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과징금을 깎아주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는 원론적 주장도 적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송은지 연구위원은 “담합 규제의 궁극적인 목표는 담합 가담자 처벌이 아니라 시장경제의 효율성을 해치는 담합을 못하게 하는 데 있다”며 “대기업의 활발한 자진신고는 오히려 리니언시 제도가 대기업 담합 규제에 특히 효과적이라는 신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과징금만 깎아준다” 솜방망이 처벌 지적도

 또 ‘대기업 과징금 1조8000억 깎아줬다’와 같은 보도를 많이 봤을 겁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오해가 있습니다. 공정위가 특정 담합 사건에 대해 기업들을 적발하고 과징금 부과를 발표할 때는 리니언시 제도를 적용하기 전 시점입니다. 감면이 되고 난 이후 최종 과징금을 기준으로 공정위가 담합 사건을 발표할 경우, 자진신고자를 일반에 공개하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이렇게 되면 향후 여론의 비난을 우려해 자진신고를 꺼리게 되고, 결국 담합에 대한 공정위 조사는 어려워지게 됩니다.

 다만, 이런저런 구실로 과징금을 깎아주다 보니 결국 ‘솜방망이’ 처벌만 남았다는 지적은 할 수 있습니다. 공정위도 이 지적을 수용하는 분위기입니다. 노대래 공정위원장은 최근 “감경사유·감경비율 조정 등 실질적인 과징금 부과 수준을 높이는 방향으로 제도 개선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세종=최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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