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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한·미합동첩보비화 「6006부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인류역사상 최초로 공중정찰을 시도한 사람은 「노아」다. 성서에 보면 「노아」가 「대지의 표면에서 홍수가 다 가셨는가를 알기위해 비둘기를 달려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노아」가 공중정찰이란 근대적인 정보활동의 형태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첩보활동에 있어서는 항공정찰뿐만아니라 각국 추락항공기의 정밀조사 같은 것도 중요한 활동으로 되어있다.
6·25동란중 나와 나의 대원은 함남북일부와 평북일부지역을 제의한 거의 모든 지역을 미극동공군의 지원아래 돌아다니며 아군기와 적기에 대한 추락기 조사를 실시했다. 아군추락기를 조사하는 것은 아군기 비밀장비가 파괴되었는지, 혹은 적이 떼어갔는지를 알 수 있는등 여러가지 목적이 포함되어있고 적추락기를 조사하는 것은 적의 새로운 통신을 포함한 각종장비· 무장등에 관한 기술· 정보획득, 적조종사의 신원, 적기추락원인등을 알아냄으로써 공격전술과 전투기술개발에 필요한 자료를 얻는데 목적이 있다.
1950년8월초순 나는 00명의 대원을 인솔하고 안동비행장 조사에 나섰다.
피아간에 몇번 빼앗고 빼앗겼던 안동은 이무렵 한때 소강상태에 있었다. 우리가 구안동비행장을 조사하러 나선 것은 북괴가 이 비행장을 근거로 대구시내에 소이탄폭격을 기도했다는 첩보때문이었다. 대가 가기 전에 여러번 조사반을 보냈으나 기체나 폭탄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나의 임무는 항공기와 폭탄을 찾아댐으로써 적이 다시 안동에 들어왔을 경우 대구폭격을예방하는데 있었다. 나는 구안동비행장을 중심으로 반경 2㎞이내 지역을 외곽부터 샅샅이 살피며 좁혀들기로 했다. 동쪽 약2㎞되는 산골짜기 흙이 다른흙과 색깔이 약간 다른 것을 수상히 여겨 즉시 그곳을 파보니 많은 포탄과 소이탄이 산골짜기를 5백m쯤 따라 숨겨져 있었다. 다시 비행장에서 서쪽 약1㎞되는 철길밑 배수로에서 「박스」에 포장한채 감춰둔 항공기 1대분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이와같은 적기 및 폭탄발군은 수없이 많았다. 군산비행장 동북방 약2㎞뒤는 옥구군미면야산 기슭과 황해도신막비행장 남쪽 약1㎞ 암굴속에서 폭탄저장고를 발견하기도 했다.
특히 북괴공군교도연대가 있었던 함남선덕비행장과 습격기연대가 있었던 함남연포비행장 막사에는 조종사의 장병들의 명찰이 그냥 붙어있었고 중요서류도 그대로 있었고, 선덕비행장에는 포장조차 듣지 않은 선품YAK전문기 1대를 찾아내 적이 얼마나 황급히 도망쳤는지 눈에 보는듯 선했다.
또한 주민들의 신고로 경기도 포천에서는 괴뢰공군습격기연대장 박모가 추락, 사망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던 일도 있다. 주민들의 신고는 많은 괴뢰군들이 포천읍에서 30리가량 떨어진 이상한 묘에 찾아와 인사하고 갔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거물급이 틀림없다고 단정하고 부근 일대를 뒤지기 시작했다.
어느 민가 근처에서 추락된 괴뢰습격기 꼬리날개 잔해를 발견했다. 날개에 「1」자가 써있었는데 이것은 습격기 연대장 항공기임을 뜻하는 것이었다.
다시 세밀한 조사를 실시한 결과 「헬멧」, 비행모, 신분증, 항공지도등을 발견할 수 있어 이 무덤은 습격기연대장 박모의 것임을 확인했다. 박은 6·25동란초 서울에 공격하러왔다 격추 당한 것이었다.
추락기 조사중 우리대원들은 공산괴로들이 미공군조종사들에게 저지른 악랄한 만행도 확인할 수 있었다.
안산부근 주민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괴뢰군등은 생포한 미군조종사 2명을 강제로 동원된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끓는 기름솥에 넣어 죽였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경기도 시흥에서는 흐뭇한 일을 하기도 했다. 6·25가 터진직후 일본에 가서 처음으로 F-51전폭기를 인수해온 고 이근석 준장은 시흥에서 남진하는 적「탱크」를 공중공격끝에 ??와 함께 부딪쳐 산화한 일이 있었다. 나는 이 장군의 유해나 기체잔해를 찾기위해 시흥에 갔었다. 공산치하에서도 주민들이 기체잔해를 부분적으로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대원들과 함께 이 장군이 산화한 지점에 새 묘비를 세우고 한잔술로 간단한 제사를 올렸다.공군이 자랑하는 대선배에게 첫인사를 올리는 후배가 된 영광을 갖게된 것은 추락기조사를 하면서 제일 감격스러웠던 일이었다.
북진이 거둡됨에 따라 나는 1950년 「크리스머스·이브」를 평성에서 맞았다. 내 고향은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대동강가의 한 촌마을이다. 나는 다음날쯤 고향에 돌를 계획이었다.
더구나 고향사람들은 내가 국군장교로 고향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대지주였다는 이유로 대동강섬가운데 괴뢰들이 강제로 이주시켰던 나의 조부모님을 고향으로 모셔놓고 내가 오기만 기다린다는 소식이고 보니 잠이 올리없었다. 그러나 이날밤11시30분쯤 「네코」로부터 즉시 함흥으로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조부모와 고향사람들에게 실망을 안져준 것은 고사하고 그후 괴뢰들은 나의 조부모를 학살했다고 하니 불효막심 했다.
함흥으로 가는 길에서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한밤중 평양서 강동으로 가는 도중 헌병이 차를 세워주지 않았던들 불과10m도 못가 지뢰에 박살 날뻔했고 신고산으로 들어갈때에는 시골아주머니 2명이 필사적으로 손짓하며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괴뢰 김책 부대패잔병 2백여명이 있는 곳을 통과하다 그대로 죽을 뻔했다. 이 헌병과 아주머니들은 나의 생명의 은인, 잊을 수 없는 분들이다.
추락기조사를 하면서 내가 각 비행장에 남아있던 괴뢰공군기들을 일일이 촬영한 것이 1백n대였다. 괴뢰공군비행부사령관 이활(이활)이 적주로 도망갈 때 10여기를 갖고 그동안 추락한 괴뢰기까지 합치면 공군정보국이 6·25직전 괴뢰공군기를 1백67대로 보고한 것과 거의 일치했다. <계속>
윤일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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