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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현장취재…70만 교포 성공과 실패의 자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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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단일 민족이란 말에 오금이 막혀서 일까. 한국인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외국인과의 피갈이를 피하려 든다. 한국인의 결혼상대자를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곳에 살면서도, 그리고 쭉 뻗은 금발의 미녀를 차지하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니면서도 이들은 힘이 닿는 한 「피의 순결」을 지키려는 것이다.
사랑을 위해 인종과 국경을 뛰어넘었던 「아름다운 용자」들에게도 이와 같은 결백증은 그 잔재를 남기고 있다. 남에게 나타나길 꺼리거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심한 경우에는 대사관에 신고하는 주소마저 엉터리의 거리이름과 엉터리의 지번으로 적어서 장막 친다. 서 「베를린」에서 두 시간을 찾아 헤맸던 최모(25·서울) 김모양(26·광주)등이 바로 이런 「케이스」였다.
따라서 웬만큼 자신이 없거나 결혼에 실패한 사람들은 아예 처음부터 방문을 사절했다.
그러나 국경과 인종을 뛰어넘어 커다란 사랑은 이들의 거의 대부분을 낙원에의 꽃길로 이끌어간 듯이 보였다.
적어도 지금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있었던 것이다.
연속방송극 『또순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던 장서일씨(37)는 「프랑스」계 「캐나다」인과 결혼한 「케이스」. 또순이 장씨는 유학차 「파리」에 왔다가 그와 결혼했으나 길거리에 아는 한국인을 만나면 즉석에서 소개시켜주고 집으로도 초청할 만큼 스스럼없이 지냈다.
기자가 그녀의 아파트를 찾았을 때는 부부동반으로 「아프리카」의 「세네갈」공화국에 간 뒤였다. 「아파트」관리인의 말에 의하면 부군이 「세네갈」정부의 경제고문으로 초청되어 약2년 예정으로 『출장 중』이라는 것이다. 60줄에 들어선 관리인은 「마담·강」이야말로 이 「아파트」의 장미였다』면서 『그처럼 단란한 부부는 평생 처음 봤다』고 끝없이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행복한 가정」을 두 눈으로 확인하기는 서독 「필른」시의 김유현씨(25·서울) 집에서였다. 자그마한 「아파트」, 가정밖에 모르는 남편과 7개월 된 아들, 짬짬이 나는 시간에 아기의 옷을 뜨개질하는 주부…. 거기에는 서구의 흔해빠진 소시민생활과도 다르고 동양의 멋없는 부권사회와도 다른, 동·서의 이상적 접목이 이뤄져 있었던 것이다.
김유현씨가 지금의 남편 「노벤·디트마르」씨(27)를 만난 것은 4년 전. 진명여고를 졸업한 뒤『유학 가는 기분으로 독파 간호원을 지망했던 덕분이었다. 서독에 온지 1년쯤 지났을 때 였을까. 전기 「엔지니어」였던 「디트마르」씨가 발에 경상을 입고 김양의 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약15일간 입원해 있으면서도 「디트마르」씨는 아무런 내색이 없었다. 『정중하고 끈질긴』사랑의 공세는 퇴원한 다음날에야 시작된 것이다.
「데이트」신청과 차가운 묵살이 매일같이 반복되기를 6개월. 그 동안 「디트마르」씨가 애용한 방법은 「침묵의 농성」이 이었다고 한다. 아무소리 없이 병원 문 앞에서 서성거리지만 김양이 그 앞을 지나가도 눈인사만 보낼 뿐 일체 말은 안 한다는 것이다.
김양의 마음이 움직이고 국가의 허락이 내려지기까지 걸린 시간이 무려 3년. 이렇게 사랑의 역사를 들려주던 「디트마르」씨는『새로 하라면 못할 것 같다』고 그동안의 애먹었던 충정을 표현했다. 처음 맞았던 시련이 워낙 컸었던 때문일까. 이들에게는 생활습관의 차이 따위는 아예 문제되지가 않았다. 서로 상대방에 동화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처음에는 김치냄새를 참느라고 무척 애를 쓰는 듯이 보였던 「디트마르」씨가 요즘은 김씨보다 오히려 더 자주 찾는다는 것이다.
내년여름을 목표로 「처가 나라 방문기금」을 다달이 저금하고있다는 「디트마르」씨는 이것이 그의 아들에게는 「교육여행」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동양엄마와, 서양 아빠 밑에서 자란 탓인지 동양남자나 서양여자는 영 무서워하는 괴벽이 있는데 내년 여행길에서 완전히 뜯어고치겠다는 얘기이다.
이들과는 조금 다른 면을 갖고있지만 「스웨덴」의 한정우(43)·영우씨(38) 형제도 행복을 누리는 국제결혼의 한 예였다. 다만 형, 정우씨의 부인이 「스웨덴」고등법원의 검사이며 영우씨의 부인은 귀족출신이어서 「소시민적인 단란」과는 약간 격을 달리한다는 점이 있었다.
그리고 서독에서는 주한미군과 결혼했다가 남편을 따라 그곳까지 온, 이를테면 고전적(?)국제결혼 「케이스」의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이들은 외향적인 미국인의 성격에 동화된 탓인지 한국인을 일부러 기피하거나 어색해하지 않는 것이 하나의 공통된 특징이었다. 뿐만 아니라 밑바닥 생활의 기억밖에 없는 고국이지만 이들은 누구보다도 한국을 사랑했다. 혹 묵은 신문을 뒤적거리다가 수재민의 참상 따위가 실려있는 것을 보면 푼푼이 모았던 돈을 대사관으로 부치는 것도 바로 이들인 것이다.
헌데 「유럽」에서는 그토록 많이 되던 국제결혼 「케이스」가 「아프리카」에서는 단 한건도 발견되지 않았다. 「아프리카」에 와있는 구주인들의 경우 흔히 계약결혼 따위로 엄벙뗑 지내는 사람이 많은데 한국인중에는 이런 「케이스」마저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인의 사랑이 까만 피부 앞에서만은 약하다는 증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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