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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신구-학계구명 기다리는 무령왕릉 출토품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왕과 왕비의 장신구는 금투성이다. 조사단장 전원룡 박사는 『평생에 처음 그렇게 많은 금을 만져봤다』는 것이 발굴소감이다. 금팔찌 한 개만도 10돈쭝은 실한데 관과 이식(귀고리) 경식(목걸이)은 물론 옷에도 금판과 금편을 무수히 달았던 것 같다.
영락(직경 7mm정도의 둥근 금판을 금사로 꿰어 달게된 것)과 상모달린 반구형장식(직경 12mm) 등 무려 수백 점에 달하는 것이 전신의 의관에 붙어 번쩍이었으리라 추정된다.
김 박사는 무령왕릉 출토의 귀금속 품이 경주 금관총(국보87호 금관이 출토된 고분)의 그것보다 더 많은 분량이라고 하면서 『백제시대 장신구의 스탠더드가 됨은 물론 이로써 총결산해도 좋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독특한 백제스타일이면서 전례 없는 양식의 공예품들이요, 개중에는 명문(은팔찌)이 있는 것까지 있다. 연대가 정확할 뿐 더러 부부의 다양한 일괄 품이 모두 완전하게 수습되었으니 앞으로 그 이상의 발견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이들 장신구가 어떻게 쓰였고, 혹은 원형이 어떠했겠느냐를 규명하는 작업은 커다란 문젯거리로 산적해 있다. 발굴이 쉽게 끝난 것에 반비례하여 복원작업에는 난점이 많을 것이 예상되고 있다.
이들 유물 층은 나무의 실뿌리가 5cm두께로 뒤얽혀 융단처럼 갈린 속에 묻혀 있었다. 나약한 실뿌리이기 다행이지만, 그것을 까뒤집어 대소 유물을 수습하자니 헝클어지기 십상이었다. 실뿌리는 끝내 둘둘 말아 두 가마니에 나눠 담아버리고 말았다.
비교적 수월하게 다뤄질 장신구가 귀고리와 팔지 및 「구절사슬 금목걸이」등이요, 그 밖의 것은 결코 논란이 적지 않으리라.
금관은 왕과 왕비 것이 각기 2개의 입화형관식으로 이루어졌는데, 일본에 있는 투조당초문금동관(고구려)에 의거한다면 그 두 입식이 관대 양옆에 세워졌을 것이다. 입식 촉에 묻은 청동 녹으로 보아 관대는 금동이 아닐까 추정되지만 발굴중 이에 관한 자료가 전혀 수습되지 않았다.
곡옥의 머리를 금갑으로 씌운 것 (금갑두식 비치곡옥)은 구슬목걸이나 요대(띠)같은데 매달린 것으로 보이는데 발견된 위치가 죄다 확연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금갑에 박혔었을 구슬 알은 하나도 못 찾았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구슬은 목걸이와 그 밖의 여러 곳에 사용된 것 같다는 점도 하도 많아 비로 쓸어 담았다는 얘기다.
전신에 걸쳐 흩어져 있던 영락은 계복의 방탄용 철편을 비늘처럼 붙인, 그런 복식이 아니냐는 의견도 나오는 형편. 특히 왕비가 지니고 있는 「비취인형」(약4cm)은 호신용의 「옥동자」이겠는데 머리에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패물의 일종. 손을 모으고서 있는 모습이 여간 예쁘지 않았다고 전한다.
장신구중 특히 「금제 연화당초문 뒤꽂이 는 우리 나라 민예품 중엔 찾아볼 수 없지만, 일본에는 근세까지 그와 똑같은 형태가 전래되고 있다고 최순우씨는 말한다. 금관입식이 일본 법강사 「백제관음」보관의 그것과 유사한 무늬란 점이라든가, 또 백제문화가 일본에 전래되어 바탕을 이루었다는 기록 등을 상고한다면 무령왕릉 유물이야말로 일본학계에서도 다시없는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이종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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