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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5)제14화 무역…8·15전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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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국무역협회>(하)
무역협회는 지방과 해외지부도 개설했다. 46년 겨울 맨 먼저 부산지부를 개설, 당시 그곳서 대동산업을 하고있던 김지태씨(현 조선견직·한국생사회장)가 지부장이 되었으며 얼마 후 인천·강원·경북·전남지부가 생기고 해외지부로는 일본「오오사까」(대판)지부가 처음 생겨 정모라는 교포실업인이 지부장으로 있다가 정부수립 후 내가 일본을 왕래했을 때는 서갑호씨(현 방림방적사장)가 지부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무역협회는 그 당시에도 무역업계의 큰일 작은 일에 관해 활발한 대정부 건의활동을 벌였었다.
여러 가지 있었지만 군정 때 것은 별로 기억에 남은게 없고 정부수립직후로 기억되는데 협회주관으로 『전국무역업자대회』에서 정부수립을 환영하는 동시에 대외무역의 중요성을 들어 『무역청』을 따로 설치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하던 일이 생각난다.
최근에 와서도 간혹 『무역청』얘기가 나오곤 하는 것을 볼 수 있어 감회롭다.
이밖에 그때 결의문으로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무역은행』설립문제가 활발하게 논의됐었는데 20여년이 지난 지금 이 문제는 무역협회주관으로 실천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무역협회에도 변동이 생겼다. 이보다 앞서 실시된 5·10총선거에서 김도연 회장이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이승만 박사에 의해 초대 재무부장관으로 기용됨에 따라 협회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다.
원래 김박사는 무역협회장이기보다 정치인으로 더 바쁜 몸이었다.
김박사가 회장으로 있을 때 무역협회에는 장덕수·장면·윤보선씨 등 당대의 정계명사들이 자주 놀러오곤 했었다.
그러나 그의 사회적인 비중하나만으로도 초창기 무역협회 활동에는 큰 힘이 되고도 남았었는데 결국 자리를 재우게 된 것이다.
약 2개월 후에는 강성태 전무가 김박사의 요청으로 재무부 세관국장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그해 8월에 이활씨가 제2대회장으로 「컴백」하고 나익진 조사부장이 전무로 승진했으며 비상근부회장으로는 김익균(건설실업), 박병교(화신무역) 양씨가 뽑혔다.
이보다 앞서 그해 봄 정기총회에서 강성태씨가 전무가 될 때에는 김도연 회장이 유임되고 주요한(상호무역) 박병교(화신무역) 김지태(부산지부) 등 세 사람이 부회장에 선출되어 잠시 일을 보았었다.
어쨌든 나씨의 승진으로 후임조사부장에 고승제씨(현 경제과학심의회의상임위원)가 들어오고 또 이 무렵에 안림씨가 조사과장으로 들어와 『무역』을 주간으로 발행하는데 애를 많이 썼다.
정부수립과 더불어 또 하나 달라진 것은 사무실이었다. 무역협회와 함께 있던 상공회의소는 정부수립과 동시에 조선호텔 맞은편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무역협회도 상공회의소측의 배려로 함께 갔다. 상공회의소 맨 아래층 외교회관 자리에 바로 무역협회가 있었다.
얼마 후 이번에는 상공부의 배려로 무역협회는 지금의 무역회관 건물로 다시 옮겨 6·25때까지 있었다.
상공부는 원래 지금의 한국전력부근 국민은행본점 신축부지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정부수립과 함께 적산인 미도파백화점 건물로 옮겼다. 이때 비료와 양곡 등 주로 관수물자수입을 대행시키기 위해 정부가 세운 대한교역주식회사(대표 오정수)가 상공부를 따라 이 건물에 들어갔는데 무역협회는 당시 상공부무역국장이던 박충훈씨의 주선으로 입주하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무역협회는 그 뒤 정부에 진정, 수복과 동시에 무역회관을 불하 받는데 성공하게 되었는데 무역협회가 이 건물을 불하 받기까지는 꼭 겉과 숨은 얘기가 많았다.
얘기가 시대적으로 다소 빗나가는 것 같아 다시 초창기로 돌려보자. 무역협회 초창기 때의 무역업자 면모를 한번 훑어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일 것 같다.
앞에서 잠깐 언급한 일이 있지만 그 당시 비교적 활발했던 회사로는 삼흥실업(서선하), 동아상사(이한원), 대한산업(설경동), 대한물산(김용성), 상호무역(안동원), 화신무역(박병교) 그리고 천우사 정도를 꼽았다.
이밖에 최초의 「마카오」무역선 「피어리어드」호를 끌고 온 사람으로 알려진 남일성씨가 원동기업을, 이순우씨는 열신공사를 자영하여 무역협회 회원으로 있었으며 그 옛날 공익사를 하던 박승직씨는 박승직 상점대표로 역시 회원이었다. 조형일씨는 당초 상호를 동양무역이라고 했다가 뒤에 대성산업으로 그쳤으며 상해에서 나온 황청하씨의 남성산업은 그때부터 갖고있던 간판이다.
한편 앞에든 유명회사들의 그 당시 면모를 보면 삼흥실업의 서선하씨는 사뭇 「홍콩」에 가있다시피 했고 최태섭 전무가 거의 모든 일을 처리했으며 동아상사에는 김인형씨가 뒤에 전무로 가서 일했다.
상호무역의 주요한씨는 해방직후 화신서 나와 한때 화상자본으로 흥한공사를 설립, 사장을 하다가 얼마 후 그만두고 상호무역 전무로 갔었으며 얼마 후에는 황해도 사리원에서 기계상을 하다가 월남한 최기호씨와 영풍기업사를 차려 함께 경영했는데 이것이 지금의 영풍상사·영풍광업 등의 전신이다.
한편 건설실업의 김익균씨는 당시 무역협회 일에 특히 열성적이었는데 6.25때 불행히도 납북되어 시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실형 김광균씨가 대신 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계속> [제자는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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