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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댓글, 박물관에 보관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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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철호
논설위원

앨 고어는 『불편한 진실』 북 콘서트마다 이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왕년의 미 합중국 ‘차기 대통령’ 앨 고어입니다.” 폭소가 터지면 한마디 더 붙인다. “사실 저에겐 그게 제일 불편한 진실입니다만….” 관객들은 모두 일어나 위로의 박수를 보냈다. 고어의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고 노벨 평화상도 받았다. 그럼에도 조지 W 부시에게 패배한 2000년 대선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전체 득표는 54만 표나 앞섰지만 선거인단에서 4명이 뒤져 112년 만에 역전패당했다.

 선거인단 25명의 플로리다주가 문제였다. 단 537표 차이로 무릎을 꿇었다. 당시 플로리다의 천공식 투표기는 치명적 결함을 안고 있었다. 바늘로 구멍을 뚫어도 뒷면이 말끔하게 떨어지지 않았다. 이 투표지가 기계에 들어가면 뒤쪽 종잇조각이 다시 구멍을 막아 컴퓨터가 무효 처리하기 일쑤였다. 민주당의 표밭인 팜비치에서 무효가 1만3000표(4.14%)나 나왔다. 지난해 통합진보당 경선 때 “투표용지 풀이 다시 살아나 붙기도 한다”는 해명보다 더 기가 막힌 일이다. 부시의 동생인 젭 부시 플로리다 주지사는 수작업 재검표의 발목을 잡았다. 라이벌인 러시아의 푸틴은 “필요하다면 우리 선거 전문가를 보내주겠다”며 조롱했다. 우리라면 촛불이 진동할 일이다.

 하지만 고어는 깨끗이 물러섰다. 7주간 재검표의 지루한 소모전에 미국 유권자들이 신물을 낸 게 결정적이었다. 그에게 연민을 느끼던 민심이 싸늘하게 식었다. CNN 여론조사에서 60%가 “이제 패배를 인정하라”고 돌아섰다. 민주당 수뇌부는 고민 끝에 고어를 설득했다. “더 이상 명분이 없다. 고향인 테네시주(선거인단 11명)에서도 지지 않았느냐….” 고어는 단념했다. “도전할 때는 맹렬히 싸우지만 일단 결과가 나오면 단결하는 것, 이것이 바로 미국”이라며 패배를 인정했다.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이 갈수록 태산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언급은 딱 두 번뿐이었다. “국정원이 어떤 도움을 주지도, 국정원에서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6월 24일)”와 “제가 댓글 때문에 당선됐다는 건가요?(9월 16일)”가 전부다. 공모는커녕 어떤 수혜도 없었다는 의미다. 초장에 대통령이 나가도 너무 나간 발언이다. 이러니 검찰총장 낙마나 특별팀장의 직무배제마저 “뭔가 숨기려는 공작이 아니냐”는 음모론이 판친다. 의문은 의문을 낳는다. 우리 사회는 작은 잘못에도 크게 책임지는 청와대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다.

 민주당 문재인 의원의 “박 대통령이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성명도 성급한 느낌이다. 그는 “지금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지난 대선은 불공정했다”고 못박았다. 그 행간에 대선 불복의 불길한 징조가 어른거린다면 필자의 난독증일까. 국정원 댓글 사건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정치권의 해석 공방만 난무할 뿐이다. 검찰 수사와 치열한 법정 다툼을 좀 더 지켜볼 일이다. 실체적 진실은 자욱한 포연이 걷히고 나야 드러난다.

 여야가 각자 철옹성을 쌓고 진지전을 벌이고 있다. 양쪽 진영논리에 국민들만 피곤하다. 국정원의 수많은 댓글과 트위터도 놀랍지만, 그런 저질 댓글에 유권자 51.6%가 홀딱 넘어갔다는 논리적 비약도 놀랍기만 하다. 어차피 이번 사태의 분수령은 어느 쪽이 중도층의 공감을 끌어내느냐에 달렸다. 박 대통령이 “국정원이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하도록 하고, 사법부의 판단을 기다리겠다”고 했으면 어땠을까. 문 의원도 “대선 불복으로 번져선 안 된다. 박 대통령의 국정원 개혁을 지켜보자”며 자기 진영을 설득했어야 했다.

 미 플로리다주는 곧바로 천공식 투표기를 폐기하고 첨단 터치스크린 투표기로 대체했다. 지금 남아 있는 천공 투표기는 전 세계에 딱 두 개밖에 없다. 하나는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있다. 2000년 미 대선의 부끄러움을 잊지 말자는 상징이다. 또 하나는 경기도 파주 헤이리의 아고라 정치 박물관에 있다. 여야가 그곳을 견학해 진짜 민주주의의 흔적을 더듬으면 어떨까 싶다. 우리의 부끄러운 국정원 댓글도 국립박물관에 보관하면서….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