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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운몽」쓴 국문학의 거성|서포 김만중 진영 발견|그 사적 의의와 풍도|이가원 <연세대 교수·문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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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이조 중기의 학자이며 소설가였던 서포 김만중의 유영이 최근 대전서 처음 발견되었다. 지금까지 선현·대덕의 모습은 전해 내려오는 것이 극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에 비록 3백년 전 인물이긴 하나 서포 초상의 발견은 학계에 큰 수확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편집자>
『구운몽』의 작자로서 서포 김만중 (1637∼1692)은 이조일대 문학가 중에서 굴지 할만큼 위대한 어른이다.
그의 명저 『구운몽』은 애당초에는 부녀자의 애독물로 내려오다가 이제에 이르러서는 문인·학사는 물론이요, 심지어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널리 읽혀지고 있다.
『구운몽』은 이제 하나의 고전으로서 주석서가 나오고 또 연구가가 많이들 등장되고 있다. 이 책의 이본이 발견될 때마다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음도 사실이다.
이제 그의 진영이 그의 후손인 김기중씨의 받들어 모신 것으로 몇 세기를 무양히 보존되어 있음이 발견되었다.
필자가 일찍이 『구운몽』을 두 차례나 간행할 때마다 그의 진영 한 조각이 있으면 책머리에 넣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면서 하나의 유감으로 생각해왔었다.
최근 서포의 방손 김영민씨에게 서포의 진영이 대전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 모 출판사에 의뢰하여 재빨리 사진을 찍어오게 하였다. 이는 이 출판사서 마침 원색으로 『한국 명인 초상 대감』을 출판하기로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서포의 진영은 광명한 햇빛을 쐬게 되었고 또 서포의 문학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서포는 물론 당시 하나의 양반 관료이다. 또 국사가 다단하고 당파적인 알력이 격심하였으므로 그의 인격과 정치 생활에 대하여서는 갑·을의 양론이 『숙종 실록』중에 실려 있다.
그러나 그가 어머니에게 효도가 극진하고 문학에 능하였다는 기록은 거의 일치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진영을 살펴보면 얼굴이 맑게 빼어나고 기상이 온자하였음은 사가의 기록과 다름이 없었을 뿐 아니라 양반 관료의 사모와 조복의 차림이 아닌 방건과 도포로 산림처사의 풍모를 풍기는 것이 지난날에 그를 연상하던 것과는 크게 다름이 있어 놀라지 않을 수 없겠다. 이 진영은 아마 그가 환해의 거센 파도에 휩쓸리기 직전에 서재에서 향을 태우고 백념을 가라앉히는 그 순간이 아니라면 서새와 남빈에서 달을 보고 울던 나머지에 늙은 어머니의 임년 정경을 위안시키기 위하여 한편의 소설 『구운몽』을 구상하던 그 순간의 기상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리라 생각된다.
그 길고도 가는 눈매에는 특히 문학적인 정채가 어리었고 맑은 수염에는 도기가 흐르는 듯 싶었다. 이야말로 7분의 영자에 또 3분의 기상이 내포된 진영이었다.
이제 서포가 차지하는 이조 일대의 문학계에서의 좌표를 말한다면 사실적인 면에서 동봉·노계·교산·고산·연암의 저가가 있다면 그 반대적인 경우에 송강과 서포의 두 대가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또 『구운몽』을 중심으로 하여 그의 문학적 사상을 고구하여 보면 유와 도와 불의 혼선이 교착된 듯 싶지마는 이는 언제까지나 서술적인 하나의 방법과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고 끝까지 그가 전적인 유교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것을 이에 특히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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