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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25 20주…3천여의 증인 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 한국 전쟁 3년|38선 돌파와 북진(3)|한국군의 월경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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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맥아더 원수는「워싱턴」과 38선 돌파 북진에 관한 권한을 요구하면서 한편으로는 북한작전 계획을 미리 착착 준비시키고 있었다. 그 계획의 골자는 미8군은 경인지역을 통과하여 38선 남쪽에서 공적준비를 갖춘 다음 10월초에 경계선을 돌파, 평양으로 향해 진격시키며 ②제10군단은 신속히 인천과 부산에서 승선하여 10월 중순에 원산에 상륙, 그후 해병사단은 한만 국경을 향해 북진하고 미7사단은 평양을 향해 서진 하며 ③미8군과 10군단은 서로 호응하여 평양을 협공한다로 되어있다.
맥아더 원수는 그 동안 워싱턴과의 끈질긴 타진 끝에 9월29일에 드디어「조지·C·마셜」국방장관으로부터 이북에서 자유로이 작전해 되 좋다는 승인을 얻고 이어 이에 대한「트루먼」대통령의 추인이 있자 재빨리 전기한 북한작전의 준비 명령을 하달했다. 또한 10월1일에는 동해안에서 급히 북상하고 있는 한국군 제 3사단과 수도사단에 대해 38선 돌파 허가의 작명이 전달되었다. 미군사고 문단의 연락기가 한국군 3사단 사령부에 투하한 통신통에는『귀 사단은 38선을 돌파, 신속히 원산을 향해 돌진하라』는 작명이 들어있었다.

<파급 3개월 안에 북진>
「맥아더」원수가 다른「유엔」군에 앞서 한국군에 대해 먼저 38선을 넘게 한 것은 당시 국군이 가장 경계선 가까이 진격하고 있는 탓도 있겠지만 다분히 정치적인 고려에서 취한 조치로 해석됐다.
여하간 이래서 한국군은 1945년 8·25 해방이래 분단된 38선을 넘게 되었다. 바로 3개월 전에는 북괴군이 이 선을 돌파하여 쳐내려왔지만 이제는 우리가 쳐 올라갈 차례였다.
그럼 이제 38선을 제일 먼저 넘은 한 연대장의 증언을 들어보겠다.
▲김종순씨(당시 제3사단23연대장=중령·예비역 육군소장·현 국방장관 특별보좌관·51)『낙동강 교두보에서 적의 마지막 9월 공세를 분쇄하고 총반격이 시작되자 우리연대는 형산강의 적진을 돌파하고 북진을 계속했습니다. 이때 노획한 적 차량들을 기동화해서 잘 이용했지요. 진격전은 일부가「트럭」을 타고 앞질러가다가 적을 만나면 차에서 뛰어내려 전투를 하고 트럭은 다시 돌아와 후속부대를 실어오곤 했어요.
강릉은 김응조 중령의 23연대가 9월30일 하오5시쯤 점령했어요. 여기서부터 우리 23연대가 추월해서 야간 진격을 계속해 10월1일 새벽 2시쯤 주문진에 들어갔어요. 밤참을 먹고 계속 쳐 올라가 아침 7시쯤 선발대가 38선에 도달했고 나 자신은 정각8시에 도착했습니다. 38선을 넘어다보니까 아주 조용하고 아무 것도 보이는 게 없어요. 이 때까지 나는 38선을 넘으라는 명령은 받지 않고 있었어요. 나는 이래서는 안되겠다 생각하고 수색중 대장을 시켜 「지프」를 타고 38선을 넘게 했어요. 수색중 대장이 38선을 건너자마자 은폐된「토치카」에서 적들이 일제사격을 가해옵니다. 중대장은「지프」를 버리고 뛰어나왔다가 나중에 차는 끌어냈어요.

<양양이 첫 북진한 도시>
나는 사람은 못 넘지만 포탄은 넘어도 괜찮겠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 화도 치미는 김에「토치카」를 향해 대전차포를 갈겨댔어요. 첫발에 명중 돼 적「토치카」가 확 무너집디다. 38선에 도착하고도 못 넘다니 애가 타고 사단사령부는 뭣하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떤 작명이 올텐데 종무소식이에요. 경계선 너머의 양양 쪽을 바라보니까 숲이 울창한 능선이 쭉 뻗어 있어요. 제2대대장 허영순 소령을 불러서 비밀을 지키라고 엄명하고 38선을 넘으라고 했어요. 만약 발각이 나면 내가 모든 책임을 질 테니 대원 몇 명만 데리고. 양양 읍내에는 들어가지 말고 능선 숲 속에 잠복해 있으라고 했어요. 11시30분쯤 목표지에 도착했다는 보고와 함께 큰일났다는 거예요.
지금 양양 읍내에서 적들이 쌀 창고에 불을 지르고 도망친다는 겁니다. 그러니 읍내에 들어가서 불을 꺼야 하느냐, 그냥 이대로 여기 잠복해 있어야 하느냐 빨라 명령을 내려 달라는 거예요. 나는 할 수 없으니 그냥 그대로 있으라고 명령하고 아무래도 안되겠기에 사단사령부로 차를 몰았습니다. 그런데 도중에서 별만이 달란 장성 지프를 만났어요.
차에서 내려 경례를 붙이고 보니까 정일권 참모총장과 위문봉 작전국장이 타고 있습디다. 정 장군은 나를 보고 「38선 넘었지」하고 물어요. 안 넘었다고 대답하니까「왜 안 넘었느냐」고 핀잔 섞인 어투로 되묻습니다.

<자발노파가 태극기 들고 환영>
앞서 38선을 한 발짝만 넘어도 엄벌에 처한다는 명령을 받았기에 못 넘고 기다리다가 애가 타서 지금 사단사령부로 알아보러 가는 김이라고 했어요. 정 총장은 그럴 리가 없는데 하면서 현장에 같이 가보자는 거예요. 이래서 나는 정 총장·강 국장과 함께 다시 북상하여 현장으로 도로 갔어요. 정 장군은 38선을 바라보면서 지금쯤 수도사단의 18연대가 벌써 넘었는지도 모르겠다고 남 속타는 이야기를 합디다. 그리고는 육본에서는 3사단23연대와 수도사단18연대가 38선을 서로먼저 넘으려고 경쟁을 하고 있는데 아마 23연대가 먼저 넘은 줄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정 총장은 다시 아침8시에 도착했다면서 왜 이때까지 안 넘었느냐고 안타까운 책망을 합디다. 이때야 정 총장이 월경 여부로 나를 떠보는 게 아니라고 깨닫고 전화로 양양 읍 능선에 잠복한, 허 영순 소령을 호출했어요. 그리고는 지금 참모총장이 와 계시니 너의 현 위치를 거짓없이 그대로 보고하라고 이르고는 수화기를 정 총장에게 드렸어요. 정 총장은 허 소령의 전화를 받고「계속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리고는 나를 보고 구렁이라고 하더군요. 할 일을 다해놓고 왜 그렇게 능청을 떨었느냐 면서 빙그레 웃습디다. 우리연대는 이때부터 쭉 밀고 올라간 거예요.
내가 38선을 막 넘으니까 오두막 독립 독립이 하나 있는데 자발노파가 구겨진 태극기를 들고 나와 흔들며 눈물을 흘려요. 정말 감격스러워 나도 울었습니다.
이 때는 이 저주스러운 민족의 분단선은 영영 무너지고 꼭 통일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래 모두 발걸음이 가벼워 뛰다시피 38선을 넘었지요.

<양양 탈환 후 내외기자회견>
양양 읍을 탈환하고 좀 있으니까 사단사령부에서 나를 호출해서 갔더니 50여명의 내외 기자들이 모여 있더군요. 「귀하는 현재 38선을 넘고 있습니다. 국군 제3사단 백」라고 영문으로 된 간만을 가운데 놓고 기념촬영을 하고 간단한 회견도 했습니다.』
38선을 돌파한 한국군의 사기는 충천하여 파죽의 진격을 계속했다. 10월2일에는 한국군 3사단과 수도사단의 사령부는 이미 38선 이북으로 진출했다. 3사단의 앞길에는 7월초이래 숙적이었던 북괴 제5사단의 잔류병력 2천여 명이 급조한 진지를 이용, 완강한 저항을 시도했다. 이로 인해 3사단 선두 추격대 차량에 상당한 피해도 생겼으나 주력부대는 이를 개의치 않고 맹진을 거듭했다.
이 추격기간 중 1군단 사령부와 별로 연락도 취하지 못하고 또한 괴뢰 패잔병대부대가 서측의 태백산맥과 금강산산 중에 도피한 것도 알았으나 사단은 이를 본체만체하며 서야겸행으로 북상했다. 3사단은 포항 부근으로부터 원산까지의 약5백㎞ 거리를 하루평균 60리씩 달렸다. 한편 수도사단도 적을 소탕하면서 급진했다.
미8군은 한국군보다 4일 뒤인 10월5일에야 38선의 돌파 명령을 받았다.

<미8기병연대 개성진격>
미 제1군단장 프랭크·밀번 소장은 10월4일에게 1기병사단에 『38선에 진출하여 군단주력의 집결을 엄호하면서 김천공격을 준비하라』고 명령하고 미제24사단은 서울 북쪽에, 그리고 한국군 제1사단은 고랑포 부근에 집결하도록 하명했다. 이래서 미제1기병사단은 10월5일 아침에 북진을 시작하여 이날 저녁 제5기병연대는 문산에서 임진강을 건너 북안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이 도하에서 잔적 저항은 별로 없었다.
6일에는 제8기병연대가 개성을 향해 진격하고 제7기병연대는 예성강변을 따라 서진하여 8일 저녁때까지 각각 소정의 장소에 도달했다. 이 동안에 미제24사단과 한국군 제1사단도 각각 목표지점에 집결을 완료하고 영국군 제27여단은 10월5일에 대구로부터 김포로 공수되어 임진강서안으로 이동했다. 미8군은 전기한바와 같이 10월5일에 북진 명령을 받았지만 실제로 38선 돌파는 정치적 고려에서 신중을 기했다.
즉8군 참모장 앨런 장군은 미제1군단이 38선 일대에 전개를 완료한 10월7일에 동경의 미 극동군사령부 참모장「도일·히기」장군에게 38선 돌파의 시일을 전화로 문의한즉『8군의 공격준비가 끝나는 대로 언제든지 좋다』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중대한 문제여서 전보확인까지 받아냈다는 이래서 서부전선에서 미1군단이 38선을 넘어 북진을 개시한 것은 10월8일이었는데 이 때 이미 중동부의 한국군은 원산과 평양에 육박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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