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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계절에 남자는 무엇을 해야 할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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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

수채화 같은 시월이 아쉽게도 지나간다. 파란 하늘은 마음에 물들고 붉은 단풍은 가슴에 떨어진다. 가을에 느끼는 남자의 감성이란 이런 것일까. 라디오 방송에서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라는 노래가 바리톤 목소리에 실려 나와 낮게 깔린다. 뭉클해져 창문을 여니 스산한 가을바람이 옷깃 속으로 들어온다. 바람과 더불어 온 불청객도 있으니 다름 아닌 쓸쓸함이다. 갑자기 이 가을도 곧 끝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이 울컥한다. 어느덧 중년 남성이 돼버린 나도 가을을 타는 것일까. 진정 가을은 남자의 계절인가 보다.

 옛말에도 ‘봄바람은 처녀바람, 가을바람은 총각바람’이라 했다. 봄에는 처녀가 바람나기 쉽고 가을에는 총각이 바람나기 쉽다는 의미이다. 산들거리는 봄바람에 처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처럼 서늘해진 가을바람은 총각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그런데 바람의 느낌은 전혀 다르다. 봄바람이 따뜻하게 움트는 생동의 기운을 느끼게 하는 반면, 가을바람은 성숙하여 마무리를 짓는 소멸의 기운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인지 ‘남비추 여희춘(男悲秋 女喜春)’이라는 옛말도 전해진다. 남자는 가을을 슬퍼하고 여자는 봄을 기뻐한다는 것이니 남성은 가을에, 여성은 봄에 감수성이 풍부해진다는 의미이다.

 가을에 남성 몸은 슬퍼진다. 떨어지는 것은 낙엽만이 아니다. 가을에는 남성 호르몬이 활발해져 서글픈 결과가 초래된다. 바로 탈모다. 이마에 잔주름이 하나둘 늘어가는 것도 슬픈데 머리카락까지 빠져 두피가 허전해지면 상실감이 배가된다. 계절 끝으로 낙엽이 떨어지듯 중년 세월 속으로 머리카락이 사라지는 가을은 고독과 상실의 계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가을이 남성에게 정말 슬픈 까닭은 남성의 사회적 존재감이 희미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여초(女超) 현상은 이미 대세가 돼버렸다. 교육계나 법조계는 말할 것도 없고 이제 경제계와 기업 활동에서도 여성이 남성을 추월하고 있다. 추락하는 남성들이 가야 할 곳은 피시방과 경마장이라고 하니 씁쓸할 지경이다.

 지난주에 운 좋게 여성 인문학자의 강의를 두 번이나 들을 기회가 있었다. 남자의 계절인 가을에도 왕성하게 강의를 하는 사람은 여성들이었다. 한 분은 색을 통해 문화를 해석하는 인문학자인데 가을 색채의 미학으로 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해주었다. 또 한 분은 고전평론가인데 남성들의 잠자는 철학 혼을 깨우는 말을 해주었다. 그가 말한 요지는 이렇다. 여성이 앞으로 경제 영역까지 장악하게 되면 백수가 된 남성들이 많아진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이성과는 멀어지고 기업 활동에 주력하다가 그만 경제동물이 되고 만다. 반면, 추락한 남성들은 고대 사회의 철학자처럼 사색하고 공부를 하다가 다시 위대한 철학을 탄생시킨다. 결국 한 시대를 이끄는 사상은 남자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비록 농담이 섞인 말이었지만 한번쯤 성찰해야 할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곰곰이 따져보니 꼭 맞는 건 아니었다. 위대한 철학과 사상은 독서가 기반이 되어야 하는데 남성들은 책과 출판 분야에서도 변방으로 밀려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서점에서 실용서뿐만 아니라 소설이나 인문서 등 모든 분야의 책을 구매하는 성비를 조사해보니 여성이 남성을 훨씬 앞지른다고 한다. 가까운 도서관에 가봐도 책을 읽고 대출하는 이용객들은 단연 여성이 많다. 그렇다면 남성들은 무엇을 하는가. 내 주변을 돌아보면 그나마 건전하다는 남성들은 대부분 먼 타국의 스포츠에 몰입해 있다. 모일 때마다 거의 생중계 수준으로 한국 선수들의 활약상을 내게 알려준다. 하지만 너무 광적으로 보여 이런 의문이 생겨난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가을이 남자의 계절이라면 당연히 사색하고 독서하는 남자가 많아져야 한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일 뿐 아니라 수확의 계절이요, 독서의 계절이 아니던가. 아름다운 계절에 고독을 느낀다면 사색과 독서를 통해 반전의 기회를 준 까닭이다. 쓸쓸한 남자들이여, 연암 박지원 선생의 말을 한번쯤 상기해보자. “많을수록 더욱 유익하고 오래되어도 폐단이 없는 것은 오직 독서뿐이다.”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