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 칼럼] '破格'만으론 부족하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정권교체란 좋은 것이다. 전에는 안 들리던 신선한 소리, 눈길 끄는 발언이 속속 나온다. 노무현 대통령은 소위 권력기관에 의존하는 정권이 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국가정보원은 더 이상 국민관심을 끌지 않을 실무기관으로 만들고, 검찰이나 국세청도 오직 법에 따라 수사하고 세금만 걷도록 해 이들이 권력기관이 되지 못하게 하겠다고 했다.

문재인(文在寅)민정수석은 청와대가 검찰의 보고를 받지 않는 것은 물론 어떤 협의체제도 갖고 있지 않다면서 검찰이 알아서 하는 것도 盧대통령이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 책임총리제 과연 지켜졌나

이런 반가운 얘기가 또 있을까. 그토록 오랜 기간 목메어 부르짖어온 검찰의 독립, 권력기관의 탈(脫)정치가 마침내 실현되리라는 얘기 아닌가. 정치시녀.표적사정.편파수사.도청.사찰.정치적 세무사찰… 이 사회를 불의와 분열로 몰던 구악(舊惡), 구폐(舊弊)들이 정말 사라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盧대통령은 앞으로 남북관계도 국민에게 소상히 보고드리고 국민합의를 바탕으로 추진하겠다고 했다. 이 역시 얼마나 듣고 싶던 소리인가.

盧정부의 첫 내각은 확실히 파격이었다. 그러나 파격이면 어떤가. 지킬 만한 괜찮은 '격(格)'이라면 지켜야 하겠지만 고리타분하고 켜켜이 때묻은 '격'이라면 깨버리는 파격이 더 좋다.

盧정부는 이처럼 가슴 설레는 좋은 발언과 신선한 파격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문제는 일이고, 초기의 좋은 맹세를 지키는 실천이다. 산뜻한 출범 뒤에 지금은 잘 보이지 않는 그늘과 문제를 지속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당장 이번 인사는 盧대통령이 그동안 밝혀온 책임총리제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내각구성은 장관후보 인선부터 기용결정까지 당선자와 그의 막료들이 주도했던 것 같다.

제청권자인 총리가 들러리였던 건 그 전과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몇몇 자리를 빼고는 총리는 '협의'는 했지만 '제청'은 못 했던 게 아닌가 싶다.

특히 걱정스러운 것은 이른바 참여정치의 구현방법이다. 고건(高建)총리가 추천했다는 오명(吳明)씨를 두고 청와대 홈페이지에는 심지어 대통령에게까지 욕설을 퍼붓는 반대의견이 몰렸다고 한다.

그 바람에 吳씨는 스스로 사양하고 말았지만 吳씨에 대한 호.불호(好.不好)를 떠나 장관인사를 인터넷 여론이 좌우하는 선례를 남긴 것은 문제다.

물론 인사도 민심과 여론을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사장과 사원의 입장과 안목이 다르듯이 대통령의 차원과 안목이 일반국민의 그것과 같을 수는 없다. 장관은 대통령의 안목과 국정추진의 필요성 차원에서 기용해야 한다.

대통령은 자기의 국정수행을 위해 필요한 경우 여론반대를 무릅쓰고라도 쓸 사람은 써야 한다. 꼭 적절한 비유는 아닐지 모르나 뇌수술을 여론조사로 물어보고 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전문의가 판단할 일이다.

지난주 한 신문에 심상찮은 기사가 있었다. 盧대통령이 자기의 386참모에게 "이제 나를 놓아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며칠 전 盧당선자는 비서실 내정자들과의 저녁자리에서 과거 측근으로부터 받은 생일선물과 편지를 언급하며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그 편지엔 "…우리의 도구로서 변함없이 나가주시기 바랍니다"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 안정적 국정 중심세력 필요

생각해 보자. 대통령이 386참모에게 이제 놓아달라고 했다는 게 무슨 말인가. 대통령이 그럼 그들에게 묶여 있다는 얘기인가. '도구'라는 말은 생소하지만 대통령이 된 후까지도 그들의 '도구'가 된다면 이 역시 큰 문제 아닌가. 그렇잖아도 항간에는 盧대통령의 운동권 편향 얘기가 많다.

그러나 "놓아달라"고 할 만큼 대통령이 이들에게 잡혀 있다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대통령이 특정인.특정 세력에게 쥐여 있으면 권력집중.전횡.월권.밀실결정 등 온갖 폐단이 생기는 것은 과거 경험이 말해준다. 盧대통령은 더 이상 "놓아달라"고 하지 말고 스스로 놓여나야 한다. 그들의 '도구'가 아니라 그들을 '도구'로 써야 한다.

이번 인사과정을 보면 盧정부의 '대주주'들이 드러난다. 386운동권.노사모.일부 시민단체.맹렬 네티즌 등이다. 이들은 누구를 요직에 앉히기도 하고 밀어내기도 하는 힘을 가진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대주주들이 바로 국정수행의 주체나 중심이 되긴 어렵다. 그런 점에서 안정적.전문적 국정수행의 중심세력 형성이 盧정부의 시급한 과제가 아닌가 한다.

송진혁 <논설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