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77)|서빙고 도하|서울 수복 <2>|6·25 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 전쟁 3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미 제10군단 단장 「에드워드·M·아먼드」육군 소장은 미 해병대가 연희 고지 일대에서 적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치자 남으로부터의 수도 포위 공적을 계획했다. 처음에는 미 제l해병 사단 병력만으로 수도를 탈환할 계획이었으나 이것이 불가능하게 되자 육군 병력의 투입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이래서 18일에 인천에 상륙하여 낙동강 교두보의 미 제8군과 연결하려고 영등포를 거쳐 남하중인 미 제7사단 중의 제32연대와 한국군 제17연대가 서울 탈환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미 32연대와 국군 제17연대는 25일 상오 6시에 서빙고에서 한강을 기습 도하했다. 사전에 50여 문의 야포와 박격포로 30분간 준비 포격을 가하고 도하했는데 적의 큰 저항은 없었다.
미 32연대는 무난히 남산을 점령하고 한국군은 동남방으로 진격을 계속했다.
그럼 이제부터 서울을 남부로부터 포위 공격한 전투에 참가한 한국군 연대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

<이 대통령 명사 교출 당부>
▲백인봉씨 (당시 17연대장=대령·예비역 육군 중장·현 선인 학원 이사장·49) 『파계 쪽에서 싸우던 17연대를 비밀리에 부산으로 뽑아서 신병을 보충하는 등 재편, 인천 상륙 전에 한국군 주력 부대로 참전하게 됐어요. 나는 수도사단장을 하다가 부상을 하고 잠시 쉬다가 수도사단 산하의 연대인 17연대장이 되어 인천 상륙 전에 나섰어요. 말은 17연대지만 사실은 1개 전투단이었어요. 부산을 출발하기 전에 이승만 대통령 내외와 신성모 국방 등 몇 분이 저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어요.
그 자리에서 이 대통령께서는 서울을 탈환하되 인명과 재산의 손실을 가능한 한 적게 할 것과 피란 못나온 명사들의 구출에 특별히 유의하라고 분부하십디다.
또 이대 총장을 하다가 공보처장을 하는 김활난 박사 (고인)는 「소문을 들으니 우리 딸들 (이대생)이 적에게 협조를 많이 했다고들 하는데 그럴리가 없을 것이며, 실사 그런 아이가 있더라도 철없어 그런 것이니 잘 보살펴달라」고 부탁합디다. 이 대통령께서는 「사단장을 하다가 연대장으로 강등된 셈인데 괜찮으냐」고 해요. 나는 서울 수복에 참전하는 이 마당에 연대장 아니라 대대장이라도 영광이라고 대답했어요. 그때 이 대통령 연세가 74세의 고령인데도 군 내부 사정을 세세히 알고 계셨어요. 계급 관계로 이렇게 염려하시는 것을 보고 새삼 감격했습니다. 우리 17연대는 LST 3척과 포함 2척에 분승하고 제주도를 한바퀴 돈 다음 인천으로 갔습니다.
부대원들에게는 일본으로 간다고 속이고 인천 상륙은 비밀에 붙였어요. 17연대 병력의 3분의2가 신병이어서 배 위에서 해상을 향해 사격 훈련을 시켰어요.
서울 탈환전 때 우리 17연대는 서빙고에서 한강을 건넌 다음 적의 퇴로에 해당하는 경원선 (서울∼원산 철도)과 경춘가도 (서울∼춘천 철도)를 주로 맡았어요.

<적 신임 장교 58명 생포>
제2대대는 흑석동을 점령, 한강을 건너 남산으로 진격시키고 제3대대는 망우리를 확보케 했어요. 나는 제1대대를 거느리고 중앙청을 공격했고요.
왕십리의 한양대학교 자리를 돌파해서 망우리로 진격한 제3대대는 진격이 아주 쾌속이었습니다. 남쪽에서 2대의 「트럭」을 타고 서울로 들어오던 괴뢰군 신임 장교 58명이 제3대대가 점령한 지역을 멋도 모르고 통과하려다가 몽땅 잡혔으니까요.』
▲유창훈 씨 (당시 17연대 제1대대장 소령 전 주월 백마 사단장·현 육군 ○○학교장=소장·46) 『나는 제1대대를 이끌고 지금의 제3한강교 자리에서 도하해 한양대학 위치를 점령했어요.
그때 남산에서는 서울서 모집한 소위 의용군들이 저항했어요. 지금은 한양대학교 부근에 건물이 꽉 들어찼지만, 그때만 해도 집 한 채 없는 솔밭이었어요.
우리 대대가 미군의 수륙 양용 차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중간쯤 왔을 때 난데없이 박격포탄이 마구 떨어집디다. 한양대학 자리의 솔밭에 숨은 적이 쏘는 거예요.
1개 수륙 차에 1개분대씩 탔는데 무개차이기 때문에 한방만 맞으면 몽땅 죽는 거예요. 상당히 맹렬한 포격을 받았는데도 묘하게 한발도 안 맞았어요. 강을 건너 우선 경춘선 철도 둑에 병력을 배치하고 그날로 한양대 자리와 금호동 일대를 점령했어요. 금호동은 그때는 집 한 채 없는 들이고 묘지가 드문드문 있었어요. 그리고 「살 꽂이 다리」건너편에 대대 CP를 두고 서울의 첫 밤을 맞았습니다. 아다시피 「살 꽂이 다리」는 지금 깨지고 쓰레기에 묻혀 사용 안하고 있지만 유서 깊은 다리지요. 밤이 깊어지자 적「탱크」3대가 우르렁 거리며 나타납디다.,
대부분이 신병인 사병들은 겁을 먹고 와르르 도망을 쳐요. 그때 3·5「인치」「로키트」 포는 「살 꽂이 다리」 건너편에 있어 「탱크」가 건너오면 쏘려고 했지요.
하지만 밤이고 목표물을 못 찾은 적「탱크」는 위협 사격만 하다가 그냥 가버립디다. 이날 밤에 적 「트럭」한대가 우리가 점령한 지역 안으로 들어왔어요. 기습으로 잡았더니 약20명의 괴뢰군 신임 소위들이 타 있고, 수십개의 상자 속에는 기름이 반들반들한 새 권총이 들어있습디다. 그 이튿날 태릉으로 진출했어요. 비행기 폭격 한계선 (No Fire Line)이 있어 적의 저항이 없다고 해서 함부로 시가 쪽을 향해 진격할 수가 없었어요.
이곳서도 적「탱크」한대가 덜컹거리며 우리 대대쪽을 향해 공격해 오다가 미군 기가 덥치려고 하니까 초집으로 쑥 들어가 지붕을 쓰고 앉아 버려요. 비행기가 지나간 다음에 「탱크」가 안 움직여서 가보니까 「탱크」병들은 도망가고 없어요. 이래서 「탱크」한대를 손쉽게 잡았어요.

<방공호 속에 학살 시체 가득>
3일째에 중랑교와 청량리를 거쳐 「메디컬·센터」자리에 대대 CP를 설치했어요. 이때 17연대는 일신 국교에, 3대대는 서대문 극장에, 2대대는 중앙청에 각각 포진했는데 시가 점령 때는 적의 저항을 별로 받지 않았습니다. 25일에 다시 동대문 경찰서로 대대 CP를 옮겼는데 구치소와 방공호 속에 학살 시체가 가득합디다. 다시 효제 국교로 CP를 옮긴 다음 한달 동안 수도 경비 임무를 담당했지요.
이번에는 타 연대에 종군했던 한 기자의 이야기를 들어보겠다.
▲정성관 씨 (당시 대한신문 소속 종군 기자·전 한국일보 편집부 국장 겸 정치 부장·현 정무 담당 무임소 장관 보좌관·43) 『9월6일쯤 우주와 파계 쪽 전선에서 비밀리에 17연대를 뽑아 부산의 해운대 쪽 야산에 배치했어요. 새로운 임무 때문이라고 했는데 무엇인지 모두 몰랐어요.
9월10일까지 모든 장병에 새 군복과 새 장비로 무장시켰어요. 그리고 육본에서 나와 3명의 종군 기자를 선발해서 타 연대에 종군하라고 합디다. 11일 새벽엔가 극비로 상륙용 주정을 타고 해운대밖에 경박 중인 7∼8척의 수송선에 갈아탔어요. 그리고는 서남쪽으로 무작정 가는데 일본 구주 남쪽을 지나 「오끼나와」의 서쪽 공해까지 내려갔어요. 이때까지도 어디로 무엇 하러 가는지 전혀 몰랐어요.
막연히 일본으로 전지 훈련 하러 가는 줄로 생각했어요. 수송선은 위층은 미 해군들이 있고 아래층은 일본인 선원들이 조작합디다. 「오끼나와」근처에서 다시 북상할 때 백인엽 연대장이 인천에 상륙 작전하러 간다고 간단한 「브리핑」을 해주더군요. 17일 새벽에 적도에 도달했는데 벌써 한미 해병대가 상륙해서 교두보를 마련해 놨습디다. 월미도는 어찌나 폭격이 심했는지 한꺼 풀 벗겨놓은 것 같아요. 우리 17연대는 미 제7사단에 배속돼서 작명을 받았어요.
미 7사단의 2개 연대는 수원 쪽으로 남진하고 1개 연대는 예비대로 남았어요. 국군 17연대는 21일에 영등포에 들어와 과천과 국립 묘지를 지나서 서빙고 나루터로 향하는데 남산에서 적들이 총을 쏩디다. 포 종류는 없고 기관총과 소화기로 쓰는데 총소리만 요란했지 거리가 멀어서 탄알은 안 쓰데요. 서빙고 나루터를 건너니까 수백 구의 피살 시체가 강변에 널려 있어요. 괴뢰군이 양민을 천명씩 쇠사슬로 묶어놓고 기관총으로 난사한 거지요.
17연대는 3개 대대로 나뉘어 ①뚝섬과 화양리 ②한남동∼이태원∼서울역 ③한남동∼신당동으로 전개했어요. 화양리로 간 부대는 26일에 면목동으로 진출해 경춘가도를 제압했고, 27일엔 다시 미아리를 점령. 의정부 가도까지도 장악했어요. 내 기억으로는 그때 9월23일쯤에 서울을 완전히 수복할 계획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 것이 연희고지서 뜻밖에 격전이 벌어져 4∼5일 늦어진 겁니다. 17연대가 서울 동부의 외곽 지대를 포위하니까 적 주력은 경춘가도 쪽으로 도망치는 것 같습디다.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는 적을 국군은 2∼3백m 뒤에서 따라가며 쏘아댔어요.
서울 탈환전 때 많은 건물이 전화로 부서졌지만 창덕궁과 경복궁 등 문화재는 괜찮았어요. 이것은 당시의 주일 공사였던 김용주씨의 공이 컸지요.』
다음은 서울의 문화재를 구한 내막 이야기.

<미군, 문화재 보호 약속 지켜>
▲김용주 씨 (당시 주일 대표부 공사·현 전남 방직 대표 이사·67) 『미군 전법은 우선 목표를 폭격으로 녹이고 들어가는 것이 통례니까, 인천 상륙 소문이 났을 때 서울의 문화재들이 걱정이 됩디다. 그래서 9월10일에 「맥아더」원수를 찾아가서 서울 수복 때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시가를 파괴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을 했어요. 특히 서울의 문화재는 꼭 보존해야 한다고 했어요. 처음에 「맥」원수는 부서져도 미국이 책임지고 새 서울을 건실해 준다고 해요. 그렇게 되면 한국의 민족 문화는 말살된다고 했더니 지도실로 데려다가 선을 그어 보라는 거예요. 나는 정동∼덕수궁∼반도「호텔」∼을지로로 이어지는 이북을 폭격 대상에서 빼달라고 했더니 너무 넓어서 어렵다는 거예요. 「맥」원수 참모들이 청계천을 가리키면서 이 이북은 안 때리도록 주의하겠지만 꼭 책임질 수는 없다고 합디다. 서울 시가전 때 미군은 대체로 이 약속을 지킨 것 같아요. 후에 귀국하니까 이승만 대통령의 경제 고문인 「레이디」씨가 미군 장성한테 들으니까 당신이 서울시를 구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만약 나 때문에 6·25때 서울의 문화재가 다소나마도 덜 파괴됐다면 나는 이것을 내일 평생의 가장 보람된 일로 생각합니다.』
※알림=『민족의 증언』문의나 연락 전화는 (28)8211 (교환)의 74번, 야간은 (94)3415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