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이기백 교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역사학자 이기백 교수(서강대)의 어머니 김경의 여사(67)는 태릉으로 빠지는 길목 공기 맑은 동네 묵동에 살고 있다. 누상동의 이 교수가 어머니를 찾아 묵동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 부지런한 어머니는 굴비 흥정을 하다가 반갑게 아들의 손을 잡았다.
아직도 짙은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어머니는 『과일과 기적소리』에 얽힌 추억을 얘기하고, 『가장 큰 소원은 남북통일이며 8·15해방이 하루아침에 왔듯 통일도 그렇게 올 것 같다』고 말한다.
『평북 정주에서 우리는 과수원을 하고 있었지요. 사과·배·포도·앵두·대추가 철따라 달리곤 했어요. 고향 떠난 지 25년이 넘는 지금도 시장에 갔다가 햇과일 나온걸 보게되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이 교수는 새벽 일찍 일어나 과수원에서 나무를 돌보던 어머니의 모습이 늘 생각난다고 말한다. 부지런한 모습 뿐 아니라 신앙과 의지가 굳고, 그러면서 모성애에 강했던 어머니의 모습을 이 교수는 기억하고 있다.
학병에 끌려갔던 이 교수는 만주에 배치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3월에 낳았던 막내를 등에 업고 8월의 찌는 듯한 더위 속에 아들을 한번 보고자 길을 떠났다. 그러나 아들이 써보낸 편지봉투의 군대주소만으로 길을 찾을 수 없었던 어머니는 봉천에서 기차를 타고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돌아온 날짜가 8월2일이었습니다. 다음날부터 일본사람을 실은 기차가 자꾸만 밀어닥치더니 15일에 해방이 되었지요. 하나 둘 학병에 끌려갔던 동네 청년들이 돌아오는데 우리 저 사람은 안 돌아오는군요. 날마다 정거장에 나가 기차를 기다렸습니다. 집에 있다가도 기적소리만 울리면 쫓아나가곤 했지요. 꼭 죽었구나 모두들 생각했는데 다음해 2월에야 소련군에 포로가 되었던 아들이 풀려왔지요.』
어머니는 지금도 기적소리가 먼 곳에서 울리면 가슴이 설레고 아들을 무사히 돌려보내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된다고 한다.
이 교수를 맏이로 5남 l여를 둔 어머니는 해방 직후의 월남과 동란의 어려움 속에서 오랫동안 동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하기도 했다. 지금은 문리대교수 기문씨, 서울공대를 나온 광산기사 기명씨, 의사 기황씨, 서울공대를 나와 과학기술연구소에서 연구하는 기창씨, 이대를 졸업하고 출가한 혜옥씨 등 모두 대학교육을 끝내고 어려웠던 지난날을 하나의 교훈으로 회상하고 있다.
오랫동안 병석에 있는 남편을 그림자처럼 옆에서 간호해 온 김경의 여사는 일요일마다 노평구씨가 인도하는 무교회 운동집회에 나가는 것이 거의 유일한 외출이라고 말한다. 학교를 다녀본 일이 없다는 어머니지만 의지와 신앙으로 역경을 뚫어온 모습은 석학인 아들 옆에서도 오히려 당당해 보인다. <장명수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