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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얼굴'에 담긴 한국예술 한 세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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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전북 완주 책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 북디자인 100년 출판기념전’. [사진 완주 책박물관]

책은 읽는 것인가, 보는 것인가, 어루만지는 것인가. 소설가 이태준(1904~56)은 수필 ‘책(冊)’에서 자문자답한다. “하면 다 되는 것이 책이다. (…) 감정의, 정신의, 사상의 의복이요 주택인 책에 있어서랴!”

 이태준의 북 디자인(Book Design) 예찬에 따르면 잘 만들어진 한 권의 책은 그 자체로 독립된 예술품인 동시에 그 시대의 문화·경제·예술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책 수집가이자 서지(書誌) 연구자인 박대헌(60) ‘호산방(壺山房)’ 대표는 지난 40여 년 우리 책의 가치를 높이는 북 디자인에 주목해왔다.

수십 년간 수집·보관한 책 자료 소개

박대헌 대표

 『한국 북디자인 100년』(21세기북스)은 그가 1999년 펴낸 『우리 책의 장정과 장정가들』(열화당)을 보완해 학문적 뼈대를 세운 연구서다. 우리나라에 서양의 활판인쇄술이 도입된 1883년 박문국 설립부터 직업적인 북디자이너가 출현하기 시작한 1983년까지 100년 역사를 실물 자료로 다루고 있다.

개화기 도서들과 북디자이너 124명이 만든 300권의 도서 등 모두 400여 점 책디자인을 컬러 도판으로 실어 그 자체로 ‘보는 박물관’ 구실을 하고 있다. 모두 자신이 수십 년 애장해온 수집품이라 한 점 한 점 다루는 애정과 이해도가 높다.

 박대헌씨는 한국 북디자인의 역사를 여섯 시기로 나눴다. 개화기(1883~1910), 일제강점기(1910~45), 광복기(1945~50), 한국전쟁기(1950~53), 부흥기(1953~77), 산업기(1977~83)다. 기존 디자인사가 정규 디자인 교육이 시작된 광복 이후를 대상으로 삼는 게 보통이지만, 책의 편집과 표지 디자인에서는 구한말부터 근대적 디자인이 시작되기 시작했고 표지에 쓰인 회화 작품의 창작 또한 1800년대 말부터 나타났기 때문이다.

 지은이가 가장 강조하고 주목하는 시기는 우리가 지금 접하고 있는 북디자인의 출발점이 된 산업기다.

70년대 후반부터 전문디자이너 등장

김환기의 윤동주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표지 (정음사, 1955, 왼쪽), 정병규가 디자인 한 한수산 소설 『부초』(민음사, 1977)(사진 윗쪽). 백인수가 디자인한 김성동 소설 『만다라』 (한국문학사, 1979, 왼쪽). 화가 백영수씨의 그림이 실린 조세희 소설집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문학과지성사, 1978)(사진 아래쪽).

한국 출판시장에 정병규(67·정병규디자인 대표)라는 걸출한 전문 편집 디자이너가 출현해 한국형 북디자인을 개척하고 독립적인 북디자이너의 역할이 무엇인가 실천해 보였다. 정 대표가 77년 디자인한 한수산 장편소설 『부초』(민음사)는 당시로는 획기적인 표지 디자인으로 문예물 디자인의 한 모델이 되었다.

 정병규의 뒤를 이어 안상수·서기흔·조의환·최만수 등의 전문 디자이너가 등장하면서 그 동안 화가나 아마추어 장정가들이 의뢰받아 작업하던 관행이 사라지게 되었다. 특히 북디자이너의 손을 거친 『부초』를 비롯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 문학과지성사), 『만다라』(김성동, 한국문학사), 『어둠의 자식들』(황석영, 현암사) 등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출판사들은 북디자인을 담당하는 전문 디자이너를 영입하거나 외부 북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의뢰하는 일이 늘어났다.

"디자이너가 내용을 꿰뚫고 있어야”

 박대헌씨는 “북디자인은 단순한 그림이나 디자인으로 꾸며지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힘과 감동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힘과 감동은 디자이너가 책의 내용을 꿰뚫고 있을 때 나온다는 것이 박씨의 주장이다. 그래서 “북디자이너는 제2의 저자라 할 만하다”고 말한다.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자료는 전북 완주군 삼례읍 ‘완주 책박물관’에서 내년 4월 6일까지 열리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한국 북디자인 100년’ 출판기념전에서 볼 수 있다. 070-8915-8131.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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