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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적 연구기관들이 출현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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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조윤제
서강대 교수·경제학

영국에서 근무할 때 그곳의 재무부든 외무부든 국가기관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면 먼저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명시하고, 거기에 맞춰 원칙을 정하고 정책목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 인상 깊었다. 정책은 원칙에 바탕을 두고 원칙은 가치에 바탕을 두는 것이다. 서구에서는 17, 18세기부터 자유주의, 공리주의, 사회주의 등 사상이 출현하고, 이에 대한 사회적 토론이 깊어지면서 그들의 제도와 정책도 이러한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 모양을 갖추고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은 서구의 제도를 도입하면서 한국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를 충분히 논하지는 못했다. 제도와 정책은 추구하는 가치의 표현이지만 우리는 제도와 정책을 도입하면서 그 가치는 제대로 체화하지 못했거나 혹은 우리의 내재하는 가치와는 다른 제도와 정책을 도입해 온 것이다. 한국의 경제, 사회정책에 일관성이 부족하고 그 방향이 자주 바뀌는 것도 우리 사회가 공유하는 가치와 철학의 뿌리가 깊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여러 면에서 우리 사회는 길을 잃고 있다. 전통적 가치와 잣대는 소멸해 가고 있으되 새로운 가치는 정립하지 못했다. 과거에 일상적으로 통용되고 용납되던 행위와 관행이 이제는 범죄가 되고 폄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제 우리나라가 도달한 지점에서 따라가서 배우기만 하면 되던 모델은 없어졌다. 경제개발 과정에서 우리가 제도를 도입하고 운영하는 데 주요 모델이 되었던 일본은 지난 20년간 정체를 거듭하고 있다. 우리의 국가지배구조와 시장경제의 모델이 되었던 미국과 유럽에서는 금융위기와 소득격차의 심화를 겪으며 자본주의 시장체제에 대한 회의가 다시 일고 있다. 또한 서구에서도 나라마다 똑같은 제도와 정책을 추구해 온 것이 아니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자유주의적 경제제도와 정책이 압도해 온 반면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국가의 역할이 강조되고 사회적 평등을 중시하는 정책이 많이 추진되어 왔다. 이는 그들이 각기 다른 사회적 변혁 과정을 겪으면서 토론과 설득, 조정을 거쳐 공유하게 된 그 사회의 철학과 가치관에 기반한 것이다.

 해방 후 우리 국민은 전쟁의 참화를 겪었으며 산업화에 매진하고 민주화를 위해 투쟁해 왔다. 편한 삶이 아니었고, 가치와 철학을 논하기에는 매일의 생활이 너무 급박했다. 과거 유럽사회처럼 사상가를 배출할 유한계급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명문가들의 후원을 받으며 사상가와 예술가가 배출될 토양을 가지고 있지도 못했다. 냉전시대의 최전선에서 늘 안보에 위협을 느끼며 살았던 탓에 사상과 철학에 대한 토론도 자유롭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우리 국민은 스스로 우리에게 맞는 발전시스템을 창의적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지점에 서 있다. 선진국이란 스스로 길을 개척하며 제도를 만들어온 나라를 뜻한다. 정치제도와 경제제도도 과거 선진국들이 정착시켜온 제도를 잘 연구하되, 이를 맹목적으로 도입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산업화는 우리 국민의 열정과 땀으로, 민주화는 투쟁과 피로 이뤄냈지만 선진화는 우리 사회의 지식, 지성의 제고와 차가운 합리성으로 이뤄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한 국민적 성찰이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 지금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것이 독립적 연구기관(think-tank)들의 출현이다. 선진국들에서는 연구기관들이 대개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에는 미국기업연구소(AEI), 헤리티지재단, 브루킹스, 미국진보센터(CAP) 등이 각기 그들이 추구하는 보수적, 혹은 진보적 가치의 스펙트럼에 따라 구분된다. 그러나 한국의 주요 연구기관들은 거의 모두 정부부처에 소속된 국책연구원, 아니면 재벌 소속 연구원들이다. 아마 이들의 예산을 합치면 세계 어느 나라의 연구소들 예산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필자가 알기에 영국의 최고 싱크탱크라 할 수 있는 채텀하우스의 연 예산은 한국개발연구원(KDI)의 3분의1 정도에 불과하다. 정부 혹은 재벌 산하 연구기관들은 우수한 인재들을 확보해 놓고 주로 부처의 단기적 정책 현안과 정책 홍보, 혹은 기업의 입장을 대변하거나 뒷받침하는 연구과제에 매달려 있다. 장기적 관점에서 국가의 미래를 보며, 가치를 토론하고 새로운 길을 열어 가는 연구나, 우리 사회에 필요한 시대적 의제를 던지고 국민적 토론을 유도하며 제도를 정리해 나가는 역할을 할 수 있는 독립성과 중립성을 갖추지 못했다.

 이제 우리도 기부문화가 성해질 만큼 여유 있는 계층도 많이 생겼다. 민간 부문에서의 자발적 기부로 장기적이며 독립적 시각을 가지고 국가 미래와 제도에 대한 연구와 입장을 제시하는 민간연구소들이 많이 출현하기를 기대한다.

조윤제 서강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