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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신앙생활|제2593회「부처님 오신날」에 붙여|오법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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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인간은 스스로 존엄한 주체자이며 유일자라고 말한다. 오늘날처럼 신앙생활이 혼미한 때일수록 주체자로서의 자각은 크게 강조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성도하신 후 최초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일절 중생은 모두가 여래의 지혜덕상을 갖추고 있다.』는 말씀이 그것이다.
이 말은 자비와 지혜의 세계가 타력에 의존하여 개현되지 않고 자기자신에게 달려있다는 말을 의미하기도 한다.
신앙생활의 병폐로 지적될 수 있는 것도 알고 보면 우리가 있는 「현장」을 우리가 떠나 있다는 점이다. 현실 속에서 살고 있는 한 그 속에서 참된 자기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만이 신앙인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경전을 외고 기복위주로 임하는 것만을 신앙생활로 생각한다면 커다란 착각이 아닐 수 없다. 이 현실 속에 뛰어들어 자비와 지혜의 등불을 밝히려는 성실 가운데서만 신앙의 본래적인 모습은 찾아지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도 주체적인 자각, 즉 마음의 자세이다.
아무리 훌륭한 교리라 하더라도 올바른 마음의 바탕 없이는 오히려 그 교리를 모독하는 결과로 나타날 뿐이다.
세상에는 이웃의 슬픔과 괴로움을 이면하고 자기만의 안일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 흑을 백으로 합리하고 화합보다 분열과 대립의식의 조장을 일삼는 이가 잇다. 모든 가치를 물량주의에 두려하고 이해 타산이나 반대 급부만을 전제하는 통탄스러운 면도 있다. 신앙생활을 진리에 살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경향은 반종교적이며 반 인간적이라고 할 것이다.
진리에 사는 길은 양심의 길이다. 개인의 이해를 떠난 그 보편성이 생명이다. 그것은 진리를 찾는 생활이면서 동시에 정리를 행하는 생활이어야 한다. 나 개인의 이해만을 존중하는 것은 신앙 생활이 아니다. 성실하고 겸허하게 살며 정직하고 부끄러워할 줄 알며 뉘우칠 수 있는 자야말로 참된 진리와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 「자리리타」사상을 말하고 「소아」보다 「대아」를 특히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사람의 수교가 늘어가는 걱정을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지적하낟. 그러나 우리의 걱정은 사람이 많아져도 바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자꾸 역 비례적으로 줄어드는 것에 잇어야 할 것이다. 양심적이며 성실한 사람이 존중되지 않고 오히려 짓밟히는 병리를 도처에서 목격하고 있는 때문이다. 오늘의 불자(넓은 의미의 신앙인)가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까 하는 것은 자명해 진다. 그것은 자비와 지혜로운 마음을 널리 펴는 일일 것이다.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하고 바르게 갖고자 할 때 거기에 자비의 광명은 비칠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자기자신을 자비와 지혜의 세계로 인도할 수는 없다. 나 자신을 가다듬고자 정진하는 그정도와 그만큼의 자기개안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제2593회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했다. 그러나 우리는 부처님이 가르치신 그평화와 자유 그리고 사랑의 세계가 아직도 저 언덕에 있음을 통감하고 있다. 불자는 날로 늘어가고 있지만 우리의 상황은 수라의 세계에 머물러 있지 않은가! 그 모든 책임은 나 자신에게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자비와 지혜를 얼마만큼 스스로 구현해왔는가를 돌아봐야 하겠다.<승려·동국대학 교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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