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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엄마, 그리운 것들이 살아 돌아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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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환갑을 훌쩍 넘긴 대머리 아들이 치매를 앓는 구순의 노모와 마주 앉았다. 엄마가 눈을 쓱쓱 비비며 한탄한다. “어쩌냐, 이제 눈까지 멀어버렸나벼. 네 머리털이 당최 안 보인다야!” “머리털이 없으니 안 보이지!” 아들이 발끈하자 머쓱해진 엄마, “아, 그냥 대머리였구나. 흥흥.”

 느닷없이 추워진 날씨, 포근한 만화 한 편 권한다. 최근 출간된 『페코로스, 어머니 만나러 갑니다』라는 작품이다. 일본 나가사키 의 무명 만화가 오카노 유이치(63)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든 이 만화는 표지 그림부터 동글동글 귀엽다. ‘페코로스’는 탁구공만 한 작은 양파로, 대머리 작가의 별명. 아들의 벗어진 머리를 살살 쓰다듬다 철썩철썩 때리는 일이 치매에 걸린 엄마의 심심풀이 오락이자 유일한 운동이다.

『페코로스, 어머니 만나러 갑니다』 표지 그림. [사진 라이팅하우스]

 만화에는 특별한 줄거리가 없다. 치매로 요양원에 머물고 있는 엄마와 나이 든 아들이 함께하는 시간이 느릿하게 흘러갈 뿐이다. 기억이 뒤섞여 버린 엄마는 줄줄이 딸린 동생을 돌보던 어린 소녀에서 술에 취한 남편을 기다리는 젊은 아내가 되었다가, 불현듯 제정신으로 돌아와 “유이치, 털은 다 어디 갔다냐?”라며 놀란다. 명절이 다가오자 아들의 나들이옷을 챙긴다며 밤새 보이지 않는 실과 바늘로 이불 끝을 꼼지락꼼지락 꿰매는 엄마. ‘노노개호(老老介護 : 노인이 노인을 돌봄)’ 가정의 일면을 사랑스럽게 그린 이 이야기는 초고령사회에 접어든 일본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NHK 방송에서 다큐멘터리로 소개됐고, 영화로도 만들어져 다음 달 개봉을 앞두고 있다.

 무엇보다 마음을 훈훈하게 덥혀주는 건 나이듦을 응시하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이다. 주정뱅이 아버지에게 시달리는 엄마를 버려두고 도시로 떠났던 아들은 중년이 되어 손에 쥔 것 없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 엄마’라는 한 여자의 인생을 이해하게 된다. 어린 나이에 시집와 “나가사키 하늘의 솔개가 그리는 동그라미 안에서만 살아온” 엄마의 고단했지만 치열했던 삶. 그렇게 엄마를 받아들인 아들에게 치매는 끔찍한 병이 아니라 그리운 것들이 살아 돌아오는 아름다운 통로가 된다.

 책 말미에 작가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때로 어머니가 부럽기도 하다(…) 잊어버리는 것은 나쁜 일만은 아니다. 어머니를 보며 그렇게 생각한다”고. 어쩌면 인생에는 어떤 나이가 되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다행이다. 한 살 더 먹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