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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맥아더의 집념 (1)|인천상륙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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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50년9월15일 상오 6시27분.
미 제10군단 산하 제1해병사단 제5연대 제3대대는 함포와 공중 지원을 받으며 월미도로 적전 상륙을 개시했다. 맥아더 원수는 미 해군 순양함 「마운트·매킨리」호의 함교에서 자기가 손수 제작, 연출한 이 「세기적인 대 도박」의 개막을 조용히 바라다보고 있었다. 「로버트·D·터플리트」중령이 지휘하는 제3대대는 정오 6시31분에 화약 냄새가 코를 찌르는 섬 해변에 몸을 던졌다. 이어 9대의 탱크가 상륙했다. 상륙 30분만인 정오 7시1분에 월미도의 105 고지 꼭대기에 성조기가 꽂혔고 그로부터 1시간 후에는 전도를 완전히 점령했다.

<미 함재기, 인천 일원 폭격>
월미도 정상에 미국 기가 휘날리는 것을 바라본 맥아더 원수는 옆에 있는 상륙군 작전 사령관 「제임즈·도일」제독에게 오늘 아침 미 해군과 해병대는 영광으로 빛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 장병에게 전하라고 지시했다.
역전의 미 해병 제5연대는 월미도를 수비하고 있던 적 4백명 중 1백8명을 사살하고 1백36명을 생포하고 나머지 1백명 이상을 동굴 속에 생매장해 완전 섬멸했다. 1백36명의 포로들은 연 3일에 걸친 포·폭격으로 몽유병자처럼 비틀거렸다. 미 해병대의 피해는 부상자 17명뿐이었다.
맥아더 원수는 이날 하오에 아직도 초연이 자욱한 월미도에 재빨리 상륙하여 이 섬을 시찰했다. 원수의 이때 소감은 그의 『회고록』 (The Reminiscen-ces of Douglas MacArthur)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월미도에는 적이 방대한 요새 구축에 착수하려던 흔적이 뚜렸했다. 만약 내가 인천 상륙을 한달 뒤의 만조 때까지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한 자들의 말을 들였더라면 이 섬은 틀림없이 난공 불락의 요새가 됐을 것이다.』
원수의 이 기록에는 인천 상륙 안에 반대 혹은 주저하던 인사들에 대한 일침과 함께 자기의 주장이 옳았다는 자신만만한 태도가 엿보이고 있다.
마침내 썰물 시간이 되어 미 해병 「터플리트」 대대를 월미도에 남겨둔 채 지원 함대는 해중으로 대피해야 했다. 이제는 괴뢰군도 「유엔」군의 인천 상륙 의도를 완전히 알았을 테지만 제2파의 본격적 상륙은 저녁의 밀물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어떤 미 해군 참모는 이때처럼 시간 가는게 지루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오후부터는 실비가 내렸지만 미 함재기들은 3백회 이상을 출격하여 인천을 중심으로 한 반경 25마일 권을 맹격, 괴뢰군의 인천 집결을 저지하고, 순양함은 20cm 주포로 인천으로 이르는 모든 도로를 강타했다.
이때 괴뢰군은 미군의 월미도 상륙 무전을 받고 서울에 주둔 중인 북괴군 제18사단 제22연대를 인천으로 급파하려고 했으나 미 해·공군의 철의 탄 막으로 낮에는 꼼짝할 수 없었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밀물이 몰려들기 시작하자 미 해병 제1사단 제5연대의 첫 상륙 주정은 저녁 5시30분에 월미도의 바로 북쪽 방파제에 닿았다. 해병대는 사닥다리로 둑을 기어오르거나 함포 사격으로 뚫린 구멍으로 기어들어 갔다. 해안에 도착한 지 20분 후에 첫 목표인 공동 묘지를 점령했다는 해병대의 신호탄이 하늘에 치솟아 올랐다.

<북괴는 상륙 가능성 안 믿어>
제5해병연대가 해안으로 돌진하는 것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미 제1해병 연대는 인천 남쪽에 있는 블루비치를 공격했다. 높은 방파제를 기어오른 다음 제1 해병 연대는 서울∼인천 사이의 도로를 차단하기 위해 인천 북쪽 교외로 진격했다. 이렇게 해서 미 제1해병 사단은 상륙 후 24시간만에 인천에 해안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인천 지역에는 괴뢰군이 2천명 밖에 없었다. 이들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미 해병대에 몇 대의 T-34 탱크를 앞세워 대항하는 등 발악적인 저항을 시도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미 해병대는 전사 20, 부상 1백70, 실종 1명의 피해로 「세기적인 도박」에 이긴 것이다. 이것은 또 순전히 맥아더 개인의 승리이기도 했다. 북괴군은 역시 인천의 지형이 상륙 불가능하다는 생각에서 방어 시설을 마련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북괴군은 유엔군의 인천 상륙 후 당황하면서도 서울 주둔 부대를 급파해서 반격하려고 했지만 미군의 「대 물량 작전」앞에 꼼짝할 수 없었다.
맥아더 원수의 인천 기습 상륙이 성공하자 트루먼 대통령을 비롯한 각계에서는 찬사의 축전이 답지했다.
동양에서의 격언인 『승리하면 관군, 패하면 적군』 그대로의 예가 맥아더에게도 적용된 것이다. 또 여러 전쟁 저서는 다음과 같이 맥아더를 「작전의 천재와 영웅」으로 추켜 올렸다.
▲『인천 상륙 성공은 오직 맥아더 원수 개인의 공적이다.』 (전쟁 리포터, 한국 전쟁. 미 해군 전사)
▲『전황이 암담할 때엔 대담한 방책을 채택해야 한다. 인천은 「퀴벡」과 마찬가지로 상륙은 불가능이라고 생각했지만 맥아더가 적극적으로 이 모험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불가능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미 해군 협회 발행)
▲『1백%의 승리를 약속하는 작전은 없다. 어떤 작전도 도박의 요소가 포함돼 있다. 도박에 강한 지휘관과 약한 지휘관이 있다. 맥아더는 강했다.』 (미 해병대 전사)
▲『인천 기습은 대담한 도박이었다. 이것을 성공시킨 사람은 꼭 성공한다고 단언한 맥아더 뿐이었다.』 (미 육군 전사)
이제 맥아더 원수의 직업 군인 생활 중의 마지막 집념이었던 「인천 상륙 안」의 자초 지종은 다음회부터 소상히 다루기로 하고 이번에는 북괴군은 과연 「유엔」군의 인천 상륙에 어느 정도로 대비했는가를 적 측 자료에서 살펴보겠다.
여기서 그들이 경인지구 패전 이유로 내세우고 있는 『남로당 이승엽 계열의 방어 준비 태만 운운』은 그들의 소위 남북 노동당간의 알력과 공산당의 무자비한 숙청극을 노정시키는 좋은 본보기로 삼을 수 있다.
북괴의 6·25 전사인 소위 『조선 인민의 정의의 조국 해방 전사』에는 「인천 작전」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9월 중순에 미군은 이미 전투에 참가하고 있는 미2개 군단과 국방군 2개 군단의 병력으로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을 감행하고 새로 투입된 미 제10군단으로써 인천 상륙을 기도했다.
이 인천 상륙으로 인천∼서울∼원주 지역에 강력한 제2 전선을 형성하고, 「아군」 전선의 후방을 차단하여 낙동강 전선의 반격 집단과 연결하여 「인민군」 주력 부대를 일거에 포위, 섬멸하는 동시에 「아 측」후방 부대가 준비 완료 전에 전 한반도를 신속히 점령하려고 했다.
「인민군 사령부」는 「적」의 이와 같은 기도를 간파하고 인천∼서울 지구의 방비에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최고 사령관 김일성은 이미 「적」의 반격 개시와 함께 서해안, 특히 인천∼서울지구의 방어 태세를 강화하기 위해 경기도 방어 지역 군사 위원회를 조직하고 인민군 부대 와 「내무서 경비대」를 이 방어 임무에 임하게 했다. 그러나 당시 「경기도 방어 지역 군사위원회」의 책임 있는 자리에 잠입한 간첩 이승화 (주=당시 북괴 사법상 겸 서울특별시 인민위원장·1953년에 박헌영 일파와 함께 미국 간첩이란 죄목으로 패전 책임을 물어 숙청됨) 일당은 당의 적절한 지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천∼서울 지구 방어를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고 오히려 그 직권을 악용하여 방어 공사에 필요한 물자와 인원의 동원을 극력 방해했다.
「인민군 최고 사령부」는 「적」의 인천 상륙 기도가 점점 노골화함에 따라 서해안 지역의 방어를 보다 더 신속히 강화하기 위해 서해안 방어 사령부를 조직하고 사령관에 최용건(당시 민족 보위상) 동지를 임명했다. 서해안 방어 사령부에는 인천∼서울지구를 중심으로 군산항 이북 지역 해안의 방어 임무가 맡겨졌다.
당시 서해안 방어 사령부 관하의 대부분의 부대는 거의 훈련을 받지 못한 신병으로 된 부대였다. 그러나 이 신병 부대는 인천 방어전에서 완강히 저항했다.
해안에는 독립 거점 형식의 진지를 구축하고 「적」의 침입 가능한 방면에는 강력한 방어집단이 파견됐다. 한편 「인민 해군」은 인천항 부근 동남쪽에 기뇌를 부설하는 투쟁을 전개했다.

<적 전사, 기술적 열세 시인>
「적」은 기본 전선 부대 (주=낙동강 전선)의 반격과 호응해서 9월13일부터 1천대의 비행기 엄호와 3백여 척의 함선과 미10사단 관하의 미 제1해병사단, 미 보병 제7사단 및 특수 공병 여단 외에 국방 군까지 포함하여 5만여 대병력을 동원, 인천 상륙 전을 전개했다.
이 결과 피아가 주력을 투입하고 있는 낙동강 전선과 새로 형성된 인천∼서울지구의 두 전선에서 「인민군」은 양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우세한 「적」에 대항하여 가열한 전투를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월미도에서는 9월15일 상오 10시 최후의 결사 전에 돌입하는 「인민군」의 만세 소리가 메아리 쳤다. 미군은 15일 저녁 맹렬한 폭격과 함포 사격 후에 만조를 틈타서 인천항의 남북으로 상륙했다.
인천 방어의 아군 부대는 월등 우세한 「적」 상륙 부대와 가열한 전투를 전개했다. 아군기관 총수는 방파제를 기어오르는 「적」 군부대에 기습 사격을 가해 이를 격퇴했다. 인천시가에서는 9월15일 밤에 맹렬한 시가전이 전개되었다.
인천 방어 부대는 16일 새벽 인천 시가로부터 철수했다.
이상이 북괴측 자료에 수록된 인천 상륙 전의 개요이다. 맥아더의 기습에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는 것을 은폐하기 위해서 갖은 허위 주장을 나열하고 있지만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경인 지구 방어의 패전 책임을 남로당의 이승엽 일당에게 뒤집어씌운 것은 어처구니없으면서도 공산주의자들의 수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성싶다.
※알림=이번 회부터 인천 상륙을 다루고 있사오니 이 작전에 참가한 한국 해병대와 육군 제17연대 장병들의 전투 담이나 관계 사진을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연락처=중앙일보 편집국 「민족의 증언」담당자 앞 전화 (28)821l 교환의 74번 야간은 (94)3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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