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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제자는 필자|황성기독청년회(10)<제8화>-오리 전택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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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전 공화당 의장이던 정구영씨(1896년 생)는 사촌인 정구창(혼자서 제1회로 졸업) 정구평씨와 같이 초립 동인 때부터 Y서 자랐다.
옛날을 회고하면서 정구영씨는 Y마당 그 좁은데서 축구하는 것을 구경갔다가 「볼」이 초립에 맞아 납작해져서 울고 돌아왔다는 얘기부터, 1908년 13세 때 야간부 상과에 입학하여 1천 5백 명 관중 앞에서 『만민공법이 불려 대포화문』이라는 논제를 가지고 토론회 강사가 되었을 때, 정씨는 정민택·손영과 한조가 되고 안재홍씨는 다른 2명과 반대 조가 되어서 정씨 조는 만민공법을 주장하고 안씨 조는 대포 일문이 제일이라 했다. 미국과 같은 정의의 나라가 있는가 하면, 일본과 같은 군국주의 압제 하에서 사는 조선민족으로서 어린 정씨는 많은 관중 앞에서 『약속이 더 중하냐, 주먹다짐이 더 중하냐 여러분 생각해 보시오』해서 박수갈채를 받았다는 얘기며, 합병 후 이승만씨가 법학박사가 되어 금의환향하였을 때 어린 소년들은 그에게 『이굉장』이란 별명을 붙였다. 왜냐하면 그는 교실에서 걸핏하면 영어로「원더풀」 즉 「굉장」하단 말을 썼기 때문이다. 한편 상과선생인 백상규씨는 『백지독』으로 통했다. 그 역시 『지독』하다는 말을 자꾸 쓰며 신학문을 배워주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신자가 아닌 정씨는 이승만씨를 존경하면서도 그가 기도할 때는 영 이해가 안 갔다. 특히 2층 계단으로 올라가다가 중간에 서서 영어로 기도할 때…성경을 그가 도맡아 가르쳤는데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는 반드시 기도를 강요했다.
그래서 한번은 『기도는 왜 합니까』라고 대들었다. 『기도라는 것은 내 영혼과 하느님이 서로 대화하는 것이다』고 설명해 주기에 『아멘은 뭡니까』했더니 『유태어인데 나도 당신 기도에 동의한다』는 뜻이 라고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더욱 결이 나서 『하필이면 왜 유태어를 쓰며 나는 동의할 수 없는 것을 왜 강요합니까』해서 이박사가 호통을 치는 바람에 혼이 났다는 얘기다.
그러나 정씨는 이승만 박사의 그 애국정신에는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마음에 그가 외국에 가서 일찍이 개화된 모습이 한없이 부러웠다. 그래서 집에 와서 그 부친에게 영국유학을 시켜 달라고 매일 졸랐다.
허락해줄 리가 만무였다. 그래서 그는 만주를 거쳐서 서백리아를 걸어서라도 가기로 결심했다. 김천경이란 한성 외국어학교 학생과 둘이서 가출을 단행했다. 합병이 된 해 겨울이었다. 사리원까지 가니까 벌써 거지꼴이 됐다. 주막집에 들어서 이승만 선생에게 비장한 편지를 띄웠다. 『선생님 저는 걸어서 영국까지 갈래요. 영국서 돈을 벌어 가지고 배타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갈래요. 거기 가서 「프린스턴」대학으로 선생님을 찾아갈 테니 잘 봐주세요』라는 요지의 편지였다.
그리고 또 길을 걸었다. 평양까지 가니까 마음이 약해졌다. 5백50리 길이었다. 장대제 교회로 선교사를 찾아갔다. 이길함 목사와 마포삼열 이란 선교사가 있었다. 사정을 말했더니 마침 사각모 쓴 숭실대학 학생이 『얘들은 거지는 아닙니다. 큰 포부를 품고 떠났나 보니 도와주세요』해서 5 원을 보태어 받았다. 마포삼열 목사는 정거장까지 나와서 봉천까지의 차표를 사주고 부디 성공하라고 기운까지 넣어 주었다. 쪽 복음서를 수십 권 주며 기차 안에서 읽기도 하고 여객들에게 뿌리라고도 했다.
국경을 무사히 넘어 봉천역에 내렸다. 영하 20도 이하의 추운 겨울이었다. 하나 출구에서 일본순사에게 잡혔다. 뒤에 알고 보니 부친께서 경무청에다 비상수배를 하고 사진을 돌리었던 것이다. 꼼짝 못하고 갇혀있을 때 사나흘 후에 부친께서 달려 왔다.
여기까지 말한 정씨는 와락 울음을 터뜨리면서『나라가 없어진 것이 너무나 한스러워서 그런 엉뚱한 짓을 했지요』하는 것이었다. 겨우 울음을 참고 다시 얘기를 하는데,
1911년 2월인가 해서 서울에 돌아와 YMCA 학관에 다시 들어가 보니 이승만씨는 어딘지 가서 없고(지방으로 순회하다 다시 망명을 함) 월남 이상재 선생이 성경 시간을 맡아 가르치더라는 것이다. 그도 역시 똑같은 식으로 기도를 했다. 어린 마음에 또 다시 반항심이 나서 이승만 박사에게 하던 질문을 또 다시 했다.
그리고 기도할 때 머리를 빳빳이 들고 눈뜨고 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월남선생의 시선과 마주쳤다. 월남선생은 눈뜨고 기도하는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월남선생이 『구영아 너 어째서 기도는 안하고 머리를 빳빳이 들지?』했다. 정씨는 똑같은 대답을 했더니 이박사처럼 호통을 치는 대신에 『너희들 집에서 콩나물을 기르지? 좋은 콩나물은 대가리를 수그리고, 몹쓸 콩나물은 빳빳이 들지 않더냐? 구영이는 나쁜 콩나물대가리야』했다. 그러자 학생들의 폭소가 터져 나왔다. 이 순간 정씨는 기가 꺾였다. 그리고 『사람이란 하느님 앞에 공손히 머리를 수그리는 게 사람의 도리지』할 때 그 말이 이론적으로는 납득이 안 갔지만 그 큰 인격과 위풍에 눌려 굴복했다는 얘기다. 그후부터 정씨는 『콩나물대가리』란 별명이 붙었다.
또 하나 청전 이상범씨의 말…. 월남선생이 성경 시간에 들어와 시험지를 나눠주더니 눈을 감고 앉더라는 것이다. 그가 한번 눈을 감으면 좀처럼 눈을 뜨지 않는 것을 아는 학생들은 저마다 「커닝」을 시작했다. 모두가 다 성경을 베껴 썼다. 종이 올렸다. 월남선생이 벌떡 일어나서 큰 눈으로 쏘아보며 『다 베껴 썼으면 이젠 들여라』했다. 그 순간 학생들은 와락 폭소가 터졌다. 하나, 하나씩하나씩 시험지를 들일 때 양심에 가책을 받아 부들부들 떨었다는 얘기다. 『내가 기독교 신자는 아니지만 그때 청년회에서 받은 정신적 감화는 일평생 잊을 수가 없다』면서 청전은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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