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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에스터」여사의 생애|33세로 요절한 한국 최초의 여의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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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한국여성으로는 처음 미국에 유학 가서 최초의 여자의사가 되어 돌아왔던「박·에스터」씨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이렇다 할 기록이 없었다. 이대에서 오는5윌 발간할 예정인 『한국여성사』의 자료수집에 골몰하던 이핵재 교수(사회학)는 「박·에스터」씨에 관한 몇 가지 자료를 발견, 「가장 뛰어난 개척시대 여성이었던 그의 편모를 전해준다.
『평양태생으로 30대에 요절했다』는 정도로만 알려졌던「박·에스터」씨에 관한 기록은 19세기초 한국에 파견되었던 미국선교사들의 보고서 「코리아·미션·필드」와 「로제타· 홀」 여사가 쓴 그의 남편의 전기 「라이프·오브·리버런드·홀·M·D」에 부분적으로 언급되어있다. 목사인 「홀」씨 부부는 둘 다 의사였으며 「박·에스터」씨와 같은 날 결혼한 인연 깊은 사람들이다.
본명이 김점동으로 네 딸 중 막내였던 「에스터」씨는 그의 아버지와 양자로 들인 오빠가 정동 「아펜셀러」댁에 용원으로 들어가게 되자 「아펜셀러」씨의 부인 「스크랜턴」 여사를 따라 이화학당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의 가족은 당시 정동부근에 살고있었으며 평양태생이 아닌 서울태생인 것으로 짐작된다.
1876년에 낳아 7세에 이화학당에 들어간 점동은 14세 때는 정동보구녀관 의사로 부임해온「로제타·쇼」양의 통역으로 뽑힐 만큼 누구보다 똑똑한 학생이었다. 점동은 15세때 세례를 받으면서 「에스터」라는 세례명을 얻었고,18세 때는 보구녀관에서 일하는 박씨 성을 가진 총각과 결혼, 「에스터· 박」 이라는 서양식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기록에는 의사「로제타 양이 의사이며 목사인 「홀」씨를 만나 「에스터」씨 부부와 함께 결혼식을 올렸다고 쓰여있다.
「홀」씨는 결혼한 다음해인 1893년 진료와 선교를 위해 부인과 박씨 부부를 데리고 평양에 다녀온 일이 있었는데 그때 걸린 「티푸스」로 서울에 와서 사망하고 말았다. 1년만에 남편을 잃은 「로제타」 여사의 상심은 대단했으며 그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고향으로 쉬러가려고 했다.
그때 「박·에스터」씨는『나를 데리고 가 주셔요. 더 공부하고 싶어요』라고 청했다. 이렇게 해서 1895년 1월 최초의 여자유학생이 남편까지 데리고 미국에 가게 되었는데 곧「뉴요크」 공립학교에 입학했고 그해 9월에는 아동병원에 취직해서 돈을 버는 한편 「라틴」어· 생물학 등 개인교수를 받았다.
1896년 10월「에스터」씨는 「존즈·홉킨즈」 대학의 젼신인 「볼티모」 여자의학전문 학교에 입학했다. 박씨라고 밖에 알려져 있지 않은 남펀은 일자리를 구해서 돈을 벌며 똑똑한 아내의 공부 뒷바라지만 하다가 아내가 졸업하기 21일전에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고향을 떠난 지 5년 만인 1900년「에스터」씨는 우등으로MD학위를 마고 남편이 묻힌 미국을 떠나 귀국 길에 올랐다.
귀국한 「에스터」씨는 이미 한국에 다시 가있던「홀」 여사와 합께 평양기독병원에서 여자 환자만을 치료했는데 어떤 해에는 치료한 환자가 8천명을 넘은 때도 있었다. 그는 병원일 틈틈이 맹아학교를 위해 일했으며 당나귀를 타고 시골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진료와 치료를 함께 했다. 미국에서 의학공부를 한 한국인으로는 서재필씨에 이어 두 번째였던「박·에스터」씨는 1910년 4월 13일 결핵으로 사망했는데 나이는 한창 일할 33세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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