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양식 반세기(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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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양식에 민족감정>
좌옹 윤치호 선생댁에서 소문난 양식이 처음으로 대중에 흘러 들어간 것이 YMCA「그릴」이었다. 당시 일본 문화가 마구 쏟아져 나와 이른바 혼마찌라던 현 충무로 일대엔 첫 양식집 청목당(일인 경영)을 비롯 일본 책가게며 다방·까페 등이 문을 열어 동경의·「긴자」한 모퉁이를 옮겨다 놓은 양「게다」짝 소리가 드높았을 무렵이다. 양식만 하더라도 일식인지 양식인지 분간 못할 어중간한 것들이 판을 쳤다. 구미 유학에서 갓 돌아 온 기독교계 인사며 개화 지식인들은 이것이 아니꼬아 종로통에 『이것이 양식이다』고 본때를 보여주자는 뜻에서 YMCA그릴에 모여들었다.
YMCA총무는 윤치호씨의 장남 윤영선씨(76)로 1922년에 오하이오주립대학서 농학 석사를 받고 돌아 온 신예로 약현에서 미국선교사「그룹」과 양식을 종종 나눴는데「버터」와 우유와 고기를 자립 자족하려는 야심에서 개성에 송고목장이라는 꽤나 현대식 시설을 갖춘 목장을 만들 정도였다. 아뭏든 충무로쪽엔 일본계, 종로쪽엔 한국계의 양식이 도사려 3∼4명 정도의 비좁은 YMCA그릴엔 신 지식인들로 붐벼 점심땐 서서 양식을 먹는 입석 양식의 진풍경도 예사로 일어났다. YMCA그릴이 번창하자 김동성씨가 백합원 그릴을 열어 연전·이전계통 사람들을 비롯, 『서양갔다 온 사람 만나려면 YMCA나 백합원에 가면 된다』는 말이 나오게끔 되었다.
나중엔 매일 빤한 얼굴들이라 외상 제도가 성립되어 먹고 「사인」만하고 갔었는데 어떻든 종로의「그릴」과 본정(충무로)의 그리루(그릴을 당시엔 이같이 일본어로 불렀다)의 대결 같은 인상이었다. 민족 감정이 양식 세계에서도 깔렸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궁중에서는 프랑스·스타일의 정찬이 맨 먼저 들어온 대신 민간에선 값싸고 간편한 미국식 양식이 인기를 모았던 것은 그때 경제 사정으로 보아 당연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초기의 도미 유학생들은 미국에 건너가 접시닦이나 주방 설거지 등 고학으로 유학을 마쳤던 인사들이 많아 부잣집 자제들보다 이들이 양식을 제대로 시켜 먹을 줄 알았다.
보수적인 부잣집 출신들은 서양 요리라면 노린내가 난다고 의식적으로 피하고 기생집이나 왜식집을 찾아 이른바 방석「파티」를 벌이고 두들겨 먹는 풍조였는데 알고 보면 노린내가 나서가 아니라 양식이라면 괜히 먹는 절차가 까다로와 겁을 먹고 혹시 실수나 하지 않을까』두려웠던 때문이었다.
그때만 해도 오늘날과 달라 프랑스식은 양손을「테이블」가장 자리에 얹고 먹는데 미국식은 팔을 식탁에 얹으면 촌뜨기 취급을 받았다. 「수프」도 『숟갈질을 밖으로 해야한다』(프랑스 식)『숟갈을 안쪽으로 놀려야한다』(영국식)는 등 복잡한 학설(?)이 구구해 섣불리 양식집에 가길 꺼려했었는데 성깔이 급했던 어느 부자는 그릴에 나타나『내 돈 내고 내 밥 먹는데 격식이 다 뭐냐』고 수프를 설렁탕 마시듯 훌쩍훌쩍 마시고 나이프와 포크를 바꿔 들고 고기를 썰어 넣어 좌중을 놀라게 한 일화도 있었다.
한일 합방후 한국에 진출한 일본인들은 대부분 장사치나 모리배·고리대금업자 등 착취배들이 태반이었다. 이들은 한국 양식집이 번창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네발 달린 짐승은 안먹는다. 우리는 생선을 먹는다. 조선 사람은 왜 생선을 먹을 줄 모르느냐』고 얕잡아봤다. 그때마다 한국의 쿠크들은 『우리도 생선을 먹는다. 명태나 북어가 있지 않는가』고 대들었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은 『북어가 무슨 생선축에 드느냐. 일본 사람들은 그따위 맛없는 고기는 입에도 안댄다』고 비웃는 것이었다. 이 소리들 듣고 괘씸히 여긴 당시 경성일보 사장「아끼즈끼」가 교양 없는 일본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준 일화가 있다.
아끼즈끼 사장은 오스트리아 대사를 지낸 노련한 외교관 출신 귀족으로 은퇴하자 당시 재등총독이 월급 1천원을 주어 우대하고 조선「호텔」에 체재토록 하여 조선호텔에 묵고있던 참이었다. 하루는 아끼즈끼 사장이 일본 상인「그룹」수십명을 조선「호텔」에 초대, 만찬을 베풀었다. 「아끼즈끼」사장은·미리 쿠크장에게 귀띔하여 생선은 북어를 쓰도록 했다. 물론 머리와 꼬리는 잘라내고 맛있게 요리하도록 주문했다. 만찬이 끝날 무렵 아끼즈끼 사장은 좌중을 향해 『제군, 오늘 제군들이 든 요리맛이 어떠하냐』고 물었다. 이구동성으로 『참 맛있었읍니다. 특히 오늘의 도미 요리가 일품입니다』고 아양을 떨었다. 아끼즈끼 사장은 빙그레 웃으며「시가」를 꺼내 물더니 『제군, 그것은 도미가 아니고 북어야, 북어!』-, 이렇게 하여 거드름을 피던 일본 장사치들의 콧대가 통쾌하게 꺾인 일이 있었다.
YMCA와 백화원 등은 점심 한끼에 50전에서 1원씩 받아 비교적 싼 종로통 양식집엔 신진 기예 선비들이 붐벼 간략한 「런치」를 애용했던 반면 독립지사 송진우, 여운형 선생이며 김성수·윤보선씨 등은 일류가는 조선호텔이나 경성역 그릴의 주빈석에 두루마기 바람으로 나타나 주목을 끌었다. 특히 고하 선생(송진우씨의 호)은 꼭 두루마기 차림인데 삼복더위 땐 모시두루마기를 입고 언제나 조선호텔 그릴의 맨 가운데 상객 자리에 버티고 앉아 마치그릴을 고하 선생의 사랑방 같이 이용했고 당당한 풍의 여운형 선생은 경성역 그릴 주빈석에 늘 자리를 차지하여 좌중을 압도하던 일이 퍽 인상적이다.<계속>【이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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