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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서부 전선|국군 전담 앞둔 휴전선을 가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이 땅이 누구 땅인데, 오히려 떳떳하고 자랑스럽다』 1백55마일 휴전선 방위를 국군이 도맡게 됐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2·8 담화가 있던 날 전방을 지키는 장병들은 『믿을 것은 결국 우리 힘 뿐』이라는 조용한 결의 속에 진중은 되려 차분하기만 했다. 미군은 끝내 휴전선 방위 제1선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현대화』니 『선 보장』이니 8개월 동안 끈 마라톤 군사 회담도 이젠 판가름이 났다. 만약의 사태에 대한 공동 방위의 심벌인양 5백m의 판문점 전면만 남겨두고 6월30일까지 미군들은 뒤로 물러난다 하지만 국군의 요람기에 6·25 남침을 받아 휴전선에 유엔기가 나부 낀지 2l년만에 국군이 최전선에 나서게 되는 새 이정표가 새겨졌다.
『휴전선 국군 전담』소식이 전해진 2월8일, 1백55마일의 르포 길에 오른 기자가 처음 찾은 곳은 서부 전선.
꽃바람을 시샘하는 하늬바람이 영하 15도로 기승을 부리는 속에 쥐죽은듯한 산등성이엔 잔 설이 덮여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북괴군 창설 23주년 기념일이어서 이른바 『2·8축제』로 억지 무드를 자아내느라 전쟁 준비를 위한 동굴 작업의 일손도 잠시 멎은 채 적진은 고요했다. 개성이 25㎞ 남짓, 서울까지 불과 54㎞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국군 일반 경계 초소에서 만난 수색소 대장 L소위는 『휴전선 방위를 국군이 맡게 된 것을 알고 있다』면서 『전방은 아무런 마음의 동요도 공백도 없습니다. 후방에서 심리적인 걱정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라고 말했다. 이 말을 받아 대대장 K중령은 『저 능선을 보십시오. 저곳이 3년 전 김신조 일당이 기어 들어온 루트지요. 그들은 교묘하게도 한국군과 미군의 지경선 쪽으로 침투로를 정해 들어온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미군이 맡고 있는 곳은 어딘지 미덥지가 못했어요. 언제 뚫릴지 몰라 불안했죠. 심지어는 미군의 책임 구역에까지 우리 병력이 배치되어 신경을 써왔습니다. 이젠 한마디로 옆집 걱정을 않게 됐지요. 우리가 전 전선을 떠맡게 됐으니 적이 뚫고들 구멍은 완전히 막혔다고 장담하고 싶습니다.』
「비룡」이라는 닉네임을 갖고 있는 이 부대는 미2사단 ○여단과 어깨를 나란히 서울을 노리는 적의 길목을 지켜왔다. 하지만 K중령의 직속 상관인 고급 지휘관 오 대령의 견해는 좀 달랐다.
오 대령은 『미군을 덮어놓고 깔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그들의 경계는 참으로 침착합니다. 철수한다는 발표가 이미 났지만 철수도 아랑곳없이 수색대를 내보내고 촌각의 경계도 게으르지 않는데 놀랐읍니다. 도리어 나는 부하들에게 경고하고 있지요. 반드시 적은 국군 전담의 휴전선을 시험해 올 거라고-.』
『적이 반드시 우리를 시험할 것이다』는 이 전방 지휘관의 직감은 의미가 깊은 듯 싶었다. 지금까지 20여년 이곳을 지킨 미군들은 너무도 장비에만 의존해 왔다는 것이다. 전쟁감시 장비가 월등하여 장비 의존도가 높은 미군 지역을 떠맡게 되면 방위 개념을 바꿔야 된다는 것이다. 『장비와 시설이 아무리 좋아도 최후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살려 올빼미와 같이 야간 매복 망을 한시도 늦출 수 없다는 것을 우리 지휘관들은 잘 알고 있다. 현재 미2사단 지역과 인접한 곳엔 한미 조인트·벙커 (합동 진지)를 운영하고 있다. 이것도 김신조의 산물이랄까. 그러나 높은 사기로 뭉쳐진 사병들의 국방 주체 의식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우리 힘으로 풀어나가야 할 많은 고빗 길이 놓여 있다.
아군 철책 선엔 어둠에 묻혀있지만 미군 지역엔 철책선 일대에 불야성을 이뤄왔던 것이 지금까지의 실정-. 이것도 장비 의존 탓이다. 미군이 철책선 1㎞에 철야 송전을 하는데 26 갤런의 기름이 든다고 했다. 최전방 관측 초소에까지 온·냉수 샤워 시설이 돼 있는 물량 작전을 펴왔던 미군의 기지와 시설을 우리가 떠맡을 경우 우리가 이를 유지해 낼 수 있을 것인가. 연초 육군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서종철 육군 참모 총장은 『체제와 능력 면에서 미군 철수에 동요 없는 재정비를 갖추도록』 지휘관들에게 지시했었다. 우리 실정에 맞는 새 체재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전방 고급 지휘관들은 미군의 물량 위주 방위는 병사들의 훈련 목적을 위해서도 좋지 않을 뿐 아니라 철책선 쪽으로 들어오는 1명의 적도 놓치지 않으려는 우리의 전술과도 맞지 않으므로 한국군은 철저히 사람 위주로 감시하고 경계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수도 서울로부터 불과 54㎞-. 이 전선이 뚫릴 때 서울은 없다. 적의 기갑 부대를 물리칠 수 있는 시설이 모두 끝나 있었다.
적의 발짝 소리를 잡을 수 있고 야음 속에도 적의 모습을 잡아낼 수 있는 특수 장비도 갖추어져 적의 도발에 한치도 양보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임전 태세엔 이상이 없었다. 이같이 물샐틈없는 방어 태세의 완비가 정부의 2·8 결의를 발표할 수 있게 하는 밑거름이 됐다고 느껴졌다. <서부 전선에서 최규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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