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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승 1위 다투는 첫 여성 조교사 이신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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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이신영 조교사는 기수 때부터 입던 경마용 보호 프로텍터를 아직도 입고 서울경마공원 14조 마사(馬舍)를 지휘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경주를 앞두고 있으면 그녀는 배가 아프다. 스트레스성 위장병이다.

 “탕!”

 총성과 함께 게이트가 열리고 경주마의 질주에 몰입하면 배앓이도 가라앉는다. 약 2분간의 피 말리는 경주. 그는 “기분 좋은 스트레스”라고 했다.

 서울경마공원 14조 마사(馬舍)를 책임지고 있는 이신영(33)이다. 국내 최초이자 아시아 첫 여성 조교사다.

 1999년 기수학교에 입학해 2001년 최초의 여자 기수가 됐다. 여성 최초로 대상경주의 기수라는 영광도 누렸다. ‘사상 첫’이라는 수식어를 몰고 다니는 그는 2011년 4월 조교사 시험에도 덜컥 합격했다. 그것도 수석으로.

 조교사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승마를 훈련하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라고 나온다. 하지만 승마 훈련은 경마 조교사가 하는 업무의 10분의 1도 안 된다. 마주에게 말을 위탁받아 관리하면서 성적에 대한 최종 책임을 진다. 말을 훈련시키는 것은 물론 부상과 영양 상태 등을 살피며, 기수를 선택하고, 레이스 전략을 짜내야 한다. 조교사보다는 감독이라는 호칭이 더 역할을 잘 설명해준다.

 올해는 조교사로 3년째다. 서울경마공원의 조교사는 모두 53명. 이신영은 박대흥(55) 조교사와 올 시즌 다승 1위 자리를 놓고 경합하고 있다. 이 조교사는 올해 201번 출주해 37번 1위를 차지했고, 박 조교사는 260번 출주해 38승을 거뒀다. 승률에서는 이 조교사가 우위다. 30대 초반의 여성이, 자기보다 나이 많은 마필관리사를 지휘하며, 10~30년 조교사로 경력을 쌓은 선배들을 제치고 믿기지 않는 성과를 내고 있다. 프로야구에서 사상 첫 여자 감독이 사령탑에 오른 지 불과 3년 만에 터프한 코칭스태프를 이끌고 시즌 막판까지 페넌트 레이스에서 1, 2위를 다투는 것과 같은 일이 한국 경마에서 일어난 것이다.

 지난달 30일 서울경마공원에서 이신영 조교사를 만났다.

 158cm, 56kg의 아담한 체구. 짧은 머리에 화장을 하나도 안 한 얼굴이다. 화장을 안 했느냐고 묻자 그는 “인터뷰 땐 화장을 해야 하나요”라며 반문했다. 이목구비가 반듯하다. 꾸미면 예쁘다는 소릴 들을 만한 얼굴이다. 그러나 그는 “아침에 일어나 머리도 안 감고, 세수도 안 하고 곧장 마사로 출근했다”고 말했다.

 그의 아침은 일찍 시작한다. 동도 트지 않은 오전 4시30분에 일어나 5시쯤 마사에 도착해 말을 하나씩 살핀다. 새벽 조교는 경주마에게 가장 중요한 훈련 시간이다. 조교사는 여간해선 말 등에 잘 오르지 않는다. 마필관리사나 기수들에게 맡긴다. 그러나 이 조교사는 “좋은 기술이 있는데 썩힐 이유가 없다”며 “내가 직접 타봐야 말 상태도 더 잘 알고, 마주에게도 잘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오전 10시쯤 아침 조교가 끝나면 이 조교사는 마사 한쪽 말들을 씻겨주는 곳에서 쓱쓱 세수를 한다. 이신영 조교사의 세면대이자 화장대다.

 헤어스타일도 늘 남자처럼 짧다. 그는 “집에는 빗이 어디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머리를 감고 그냥 선풍기로 말린다”고 말했다. 자기 머리는 잘 안 빗어도, 가끔 말의 갈기는 직접 빗겨주기도 한다. 비싼 향수에는 관심이 없고, 말 냄새가 향기롭다는 타고난 조교사다.

낙마 사고로 고생, 100승 못 채워

 14조 마방의 식구는 모두 10명이다. 조교사가 감독이라면, 말은 선수이며, 마필관리사는 코칭스태프에 해당한다. 이 조교사가 대장이지만 나이로 따지면 지난해까지 마방에서 가장 막내였다. 지금도 9명의 마필관리사 중 7명은 이 조교사보다 나이가 많다. 이 조교사가 기수가 되기 전부터 마사를 지켜온 터줏대감들이다. 말들의 습성이나 관리 방식에 대해서는 새내기 조교사가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전문 지식도 갖추고 있다.

 호칭 문제부터 정해야 했다. 정재영(36) 마필관리사는 “처음에는 여자 밑에서 일하는 것 때문에 걱정이 많았다. 주변에서 가지 말라는 반대도 많았다. 사실 내가 나이도 더 많고 예전에는 나한테 오빠라고 불렀다. 조교사님이라고 부르는 게 처음엔 어색했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했다. 그는 “자잘한 것은 이야기하지 않는 스타일이어서 편하다. 웬만한 남자 조교사보다 더 선이 굵다. 뭐라고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하도록 만든다. 그게 카리스마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 조교사는 “내가 기수로 일할 때 조교사들이 기수나 마필관리사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게 업무보다 더 힘들고 싫었다. 마필관리사는 한 집안의 가장이며, 우리 업무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람들이다. 스스로 하찮게 생각하는 분이 많아 안타까웠다. 그분들이 자부심을 느끼며 일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고 말했다.

 이 조교사는 나이는 어리지만 조직 관리에는 빈틈이 없다는 칭찬을 듣는다. 그는 “마필관리사 중 한 분을 팀장님으로 정하고 전체 관리사를 책임지고 이끌어달라고 맡겼다. 나에게 직접 상의하고 싶어 하는 마필관리사가 있어도 팀장님을 통해 듣겠다고 넘겨버린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도 팀장님이 처리할 수 있도록 모른 척할 때도 있다. 그러면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일이 잘 되는 때가 많다. 우리 팀만큼 단합이 잘되는 곳은 없을 것이다”라고 자랑했다.

 기수 때를 돌아보면 아픈 기억이 더 많다. 895전90승으로 100승을 채우지 못했지만 조교사 시험에 합격하자 미련 없이 채찍을 내려놓았다. 2006년에는 경주 도중 말 다리가 부러지면서 낙마해 척추, 갈비뼈, 코뼈를 크게 다쳤다. 두 달 동안 입원을 하고 다시 말에 올랐지만 이후에도 부상으로 고생했다. 그러고도 다시 용기를 내 말에 올랐다. 이 조교사는 “부상당한 아픔은 금방 잊을 수 있다. 그보다 더 힘든 건 사람들의 시선이었다”고 말했다. 1등으로 들어오면 “누가 타도 1등을 할 말”이라고 수군댔다. 순위에 들지 못하면 “기수가 여자라서 밀렸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이 같은 시선은 그가 조교사로 개업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조교사는 “기수를 처음 시작할 때는 나가면 무조건 1등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런데 조교사를 시작할 때는 정반대였다. 나를 도와줄 마필관리사가 있을까. 나에게 말을 맡길 마주가 있을까라는 걱정이 들었다”고 했다.

 사실 그는 기수 시절 싸움닭으로 통했다. 승부욕이 강하고 성격도 까칠했다.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선배나 조교사 앞에서도 머리를 꼿꼿이 세웠다. 대찬 성격이라고 격려해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여자가 너무 드세다고 배척하는 사람도 많았다.

 “조교사는 동업자이자 경쟁자다. 후배가 개업하면 초기에 선배들이 말을 내주는 등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반기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마주 중에 선뜻 도와주겠다는 분이 있었다.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자리를 잡고 난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잘된 것 같다. 동료 중에는 선배들 눈치를 보는 경우가 있지만 나는 오로지 나만을 생각하고 달릴 수 있다”고 말했다.

좋은 말 찾으러 한 달에 두 번 제주도로

 이 조교사는 아직도 삐딱한 시선을 받고 있다. 처음에는 여자라서 안 된다고 하더니 지금은 여자니까 특혜를 받는다고 수군대는 시기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자 조교사라서 마주들이 이신영 조교사에게 비싼 말을 잘 사준다”며 “그런 말을 가지고 1등을 못 하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비아냥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 3년차에 불과하지만 14번 마사는 서울경마공원의 ‘레알 마드리드’(스페인 최고 축구 클럽)로 통한다. 경주마 29마리의 평균 가격이 5800만원이다. 53개의 마사 가운데 보유마의 평균 가격이 가장 높다. 2억9000만원으로 역대 최고가 말인 금아피닉스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마주들이 이 조교사의 미모에 혹해 경주마를 위탁한다는 건 어림없는 소리다.

 이 조교사가 처음 개업했을 때 말 4마리를 맡기며 힘을 실어준 강균호(67) 마주는 “승부욕이 있고, 워낙 당차 어지간한 남자 조교사보다 훨씬 잘할 수 있다고 기대했다. 마필관리사를 지휘하며 일하는 걸 보면 내 눈이 틀린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개인 마주뿐만 아니라 법인 마주 나스카와 라온건설도 이 조교사에게 경주마를 위탁하고 있다.

 한국마사회 홍보팀의 박종배 대리는 “이신영 조교사는 소통 능력이 탁월하다. 예전에는 마주들이 물어보면 간섭한다고 생각하는 조교사가 많았다. 하지만 이 조교사는 마주에게 어떤 말을 어떻게 키우고, 어떤 성과를 목표로 할 것인지에 대해 분명하게 설명한다”며 “사실 경마는 마주가 굉장히 중요한 종목이다. 이신영 조교사는 마주를 마주답게 대접하고 함께 전략을 고민하면서 한국 경마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선구자”라고 칭찬했다. 혼자 너무 좋은 성적을 내면 도리어 눈총을 받았던 서울경마공원의 분위기도 이 조교사 등 신세대의 등장으로 바뀌고 있다.

 이 조교사는 쉬는 날에도 한 달에 두 번은 제주도로 내려간다. 좋은 말이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다. 일에 푹 빠져 살고 있다. “기수 때는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는 부진해 힘들었다. 지금은 내가 별로 잘하는 것도 아닌데, 너무 일이 술술 잘 풀리는 것 같아 불안하다. 앞으로 어떤 위기가 닥쳐오더라도 이겨낼 수 있게 팀을 잘 이끌어 뿌리를 깊이 내리고 싶다”고 말했다. 대학원에도 다니고 있다. “정년까지 조교사를 하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다른 도전도 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싶다. 지금 말산업이 점점 발전해나가고 있다. 이와 관련된 분야에서 일을 하거나 현장의 경험을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도 있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는 “결혼은 하고 싶지만 일하는 데 방해도 될 것 같고 지금은 별 생각이 없다. 일도 재미있고, 마주 분들을 만나 말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면 너무 즐겁다”고 말했다. 이상형을 묻자 “정우성 같은 남자 어디 없나. 능력도 있으면 좋겠다”며 깔깔 웃었다.

이해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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