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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혁」결산 중공의 인민대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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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69년4월 구전대회(전당대회) 개최로 문혁 후유증 수습의 실마리를 잡은 중공은 곧 마지막 마무리에 착수할 것 같다. 전국인민대표 대회소집을 서두르고 있다는 증거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 의회구실을 하는 인민대표대회가 구전대회의 결정을 확인함으로써 모-임 지도체제의 「합법성」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인민대표대회(이하 인대)는 원래 매년 열리기로 되어있으나 지난번(64·12·20∼65·1·4)대회 이후 만 5년 동안 소집되지 않았다. 61년에 한번 걸렀던 것을 제외하면 거르는 일은 중공정권수립 이래 처음이다. 그러나 인대의 구성이 유소기 등 관료파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모-임 「혁명조반세력」은 자파의 대표로 개선할 때까지 미루지 않을 수 없었던 것.
모-임파의 새 인민대표가 선출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여름부터였다. 그러나 그 속도는 지극히 완만해서 연말까지 이를 완료한 것은 29개성 가운데 광동·광서·감숙·호남 등 4개성과 5개 자치구, 3개 직할시 중에서는 상해직할시 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새해에 접어 들면서는 1월 한달 동안에 흑룡강성(12일), 요령성(19일), 안휘성(25일) 등 3개성이 잇달아 새 대표를 선출했다.
그밖에도 대표 파견권을 갖고 있는 군과 화교가 『언제든지 응할 수 있는』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관계전문가들은 이번 대회가 2월말 내지 3월초에는 소집될 것으로 점치고 있다. 이러한 추측은 위에 든 지방대표자대회의 급속한 진전 외에 다음 몇 가지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이다. 첫째 이미 선출된 각 성과 직할시의 대표들이 계속 북평으로 집결한다는 점이다. 북평 시내의 대자보(벽신문)는 흑룡강성·호남성 등의 『인민대표 환영』을 대대적으로 보도한바있다. 둘째 모-임 측의 입장에서 볼 대 임기(4년)가 끝난 유소기파 대표들을 축출하는 것은 이제 손쉬운 일이 되었다는 점이다. 문혁과 구전대회의 산물인 「혁명위원회」에서 대표선출을 주관하므로 이른바 관료파들은 발붙일 틈도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대의 소집은 모-임 체제의 합법성을 부여할 뿐 그 밖의 부작용은 염려할 필요가 없게된 셈이다. 그밖에 「의회」의 장기동면이 끼치는 심리적 영향과 지난해 10월 주은래가 발표한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법적 승인문제도 심각히 고려되었을 것이라는 얘기이다.
이번 인민대표대회의 최대임무는 모-임 체제와 문혁 결산을 골자로 한 신 헌법의 채택이다.
지난해 8월23일에 열렸던 공산당 9기2중 전회는 소위 신 헌법학습토론소조가 제출한 「안」을 이미 채택했으므로 이번 대회에서의 결의는 단순한 형식에 불과하다. 그러나 4장30조로 된 신 헌법안(동경신문 11월5일자)은 54년9월에 채택한 현행헌법(4장1백6조)에 비해 『너무나 혁명적인 내용』을 담고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인민대표대회의 권한축소와 모택동의 「카리스마」공고화다. 즉 지금까지 헌법개정·법률제정·예결안 심의 및 결정·수상 인준권 등 14개항에 이르던 권한이 불과 4개항으로 줄어든 반면 모택동에게는 당·군·행정부의 전 권력을 집중시킨 것이다. 이를 위해 이른바 신 헌법은 『모택동 사상이 전 인민의 지도방침』(2조)임을 규정하고 모를 『전국·전 인민의 최고 통수』로 못박았다. 임표가 「부통수」로 명문화된 것은 물 론이다.
둘째 인민대표대회 의장의 당연 겸직이었던 국가 주석제를 폐지, 주석이라는 직위를 당에만 국한시키는 한편 『국가의 최고기관』(구 헌법)이던 인대를 『중국공산당의 지도하』(16조)에 뒀다는 점이다. 이러한 당우위 원칙을 더 확고히 하기 위해 문혁 기간 중에 임시로 설치되었던 혁명위원회를 『각급 인민대표대회의 상임기관』(22조)으로 못박고있다.
따라서 앞으로 중공의 권력구조는 모·임-당 중앙위 상무위-지방혁명위의 단순화된 체계로 굳어지게 되었다.
세째 자본주의와의 성격동화현상을 근원적으로 봉쇄했다는 사실이다. 즉 구 헌법1조가 중공의 성격을 소위 『노동자·농민의 동맹에 기초한 인민민주국가』로 규정, 항일투쟁시절의 이른바 민족통일전선사상을 어느 정도 답습했던데 반해 신 헌법안 1조는 『「프롤레타리아」계급 독재의 사회주의국가』로 바꿔버렸다.
이것은 소련과의 「마르크스」주의 정통성논쟁에 좋은 선전거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네째 소련과의 이념투쟁을 헌법 속에 도입한 것을 들 수 있다. 구 헌법전문에 실렸던 『소련과의 우의』가 삭제된 것은 물론 중공군의 임무에 『사회제국주의 및 그 주구들의 침략으로부터 지킬 것』(15조)을 추가한 것이다. 여기에서 지적한 「사회제국주의」가 소련을 지적한 것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헌법개정 외에 일부 소식통들은 이번 대회를 통해 모-임 체제하의 새 주역들이 확인될 것으로 보고 있다. 예컨대 대회 소집권을 갖고있는 상무위나 그밖에 예산위·민족위 등의 위원장 급이 모두 교체되면 새로운 인파의 계보를 그릴 수 있지 않겠느냐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69년 구전대회를 계기로 대거 진출했던 군부세력이 인대에서도 여전히 기세를 떨칠 것이냐는 점이다. 64년 대회 때 참석했던 3천37명(정원 3천40명) 가운데 군 대표는 불과 1백20명, 각 성에서 뽑혀온 군 출신을 포함해도 2백명을 넘지 못했다. 그 나머지는 모두 순수한 당 간부와 직능대표였던 것이다.
하지만 구전대회에서 선출된 2백79명의 당 중앙위원 가운데 군인이 40%(1백11명)씩이나 차지했던 사실에 비춰 볼 때 이번 입대 역시 같은 추세를 보이지 않을까 하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더구나 각 성의 대표선출과정을 군부주도하의 혁명위가 맡았으므로 이 의혹은 충분한 근거를 갖고있는 것이다. 군의 대거진출이 실현되면 임표의 지위향상이라는 직접적인 결과 외에 중공이 더욱 호전적으로 되기 쉽다는 간접적이고 장기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말하자면 소련의 평가대로 『완전한 군사관료정권』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홍사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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