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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의 군림정치와 야당의 거리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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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장달중
서울대 명예교수·정치외교학

앞이 보이지 않는 복지논쟁이나 국정원 개혁, 그리고 남북관계. 우리 주변의 움직임이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데도 ‘시간이 정지’되어 버린 듯한 곳이 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청와대와 정당, 국회다. 청와대는 정치 위에 군림(君臨)할 생각만 하고, 정당들은 민심을 잡을 대책보다는 민심을 교란시킬 생각뿐이다. 이러다 보니 정치의 중심에 서야 할 국회는 겨우 문을 열었지만 정치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예나 지금이나 청와대가 늘 정치 위에 군림해 왔다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없다. 대통령제 국가의 피할 수 없는 현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문제가 보다 심각해 보인다. 예전에는 민심을 동원할 수 있는 정치인이나, 여소야대의 민심이 군림의 정치를 의회정치로 복원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길항력의 부재 속에 대통령의 말과 눈빛에 따라 국정이 움직이는 군림의 정치가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청와대의 군림정치가 ‘마을의 유일한 게임(the only game in town)’이 되어버렸다는 냉소적 시각이 적지 않다.

 원래 우리가 염원하고 있는 ‘마을의 유일한 게임’은 민주화를 거쳐 ‘공고화된’ 민주주의다. 이런 민주주의가 가능하려면 정치세력들이 선출된 정부를 부정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법과 절차에 따라 제도권 내에서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정치세력들 사이에 습관화돼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예전과 같은 이념적 대결은 완화되었지만 선출된 정부를 부정하는 구호가 등장하고, 제도권을 이탈한 ‘거리의 정치’가 마을의 새로운 게임으로 등장할 기세이기 때문이다. 이석기 의원 체포동의안을 둘러싼 여야 간의 초당적 행위도 잠시. 지금 정치권은 노인연금, 국정원 개혁 등을 둘러싸고 진지전(陣地戰)에 돌입하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을까? 시간이 정지되어 버린 듯한 청와대와 정당, 국회 때문이 아닐까. 지금 청와대는 과신(過信)과 정직 사이의 딜레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진영 복지부 장관의 사퇴가 보여주듯 군림정치의 내부적 난맥상을 노출하고 있다. 공약사항인 노인연금 수정을 놓고 대통령이 사과하는 모습은 정직과 원칙을 과신해온 박근혜 대통령으로서는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정부가 현실을 무시해 가면서까지 공약사항을 밀어붙이는 것은 결코 정권 담당세력의 책임 있는 행동이 아니라는 점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야당은 어떤가. 노인연금 수정을 ‘대국민 사기극’이라고 비난하며 원내외 투쟁을 병행할 자세다. 대화보다 거리의 정치에 무게를 더할 모양새다. 하지만 명심할 게 있다. 그것은 깅그리치 전 미 하원의장의 바보 같은 짓이다. 1995년 클린턴정부 시절 야당으로 하원의장이었던 깅그리치. 그는 하원에서 정부의 잠정예산 통과를 저지시켜 연방정부를 마비시키는 대혼란을 초래했다. 국민들은 반발했고, 그 결과 클린턴은 96년 대선에서 압승을 거둘 수 있었다. 우리 야당도 국회 선진화법을 이용해 예산안 통과를 저지하거나, 옛날과 같은 거리정치의 감각으로 대여투쟁을 할 경우 그 불똥이 어디로 튈지 면밀하게 계산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야당은 이 같은 문제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 보인다.

 어떻게 해야 하나. 타협의 정신으로 건설적인 정치의 돌파구를 만들어내는 방법밖에 없다. 이런 돌파구는 권력을 쥐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이 야당에 대해 대화와 타협의 자세를 보일 때 가능하다. 박 대통령은 더 이상 ‘누가 옳은가’의 문제에 집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신 ‘무엇이 옳은가’를 놓고 야당과 대논쟁을 벌이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이를 위해서는 통치 시스템을 다시 한번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 박근혜정부에는 우수한 율사나, 경제학자 등 이른바 전문성을 갖춘 인사들이 많다. 이들은 정보에도 밝고 행정력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숫자와 논리에 매몰되어 있는 인상이다. 과거에 이념으로 움직이던 정치가 지난 정권에서는 돈과 정실로 움직이더니, 이제는 숫자와 논리의 장치로 변해버린 듯한 느낌이다. 이들에게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자세나 능력이 있는지 의심스러워 보인다.

 지금 우리가 원하는 것은 거리의 정치도, 숫자와 논리로 무장된 군림의 정치도 아니다. 다시 말해 ‘공고화된’ 민주주의가 ‘마을의 유일한 게임’이 되는 정치다. 그러나 청와대와 정당, 그리고 국회가 타협의 정신으로 건설적인 정치를 복원하지 못하는 한 이런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장달중 서울대 명예교수·정치외교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