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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제자는 필자|제5화「동양극장」시절(3)-박승희가 자비로…주연도 맡아 대사 막혀 중단 돈 물러주기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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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토월회」는 일본동경에 유학하고 있던 우리나라 학생들이 매주 모여서 요새말로 「세미나」라는 것을 하는 모임이었다.
그때의 「멤버」는 김복진(동경미술학교조각과·팔봉 김기진의 형) 김기진(입교대학 영문과) 연학년(동경상과대학) 박승희(명치학원영문과) 박승목(동경제대의학부) 이제창(동경 미술학교 양화과) 이서구(일본대학예술과) 등이었는데 이들은 매주토요일에 모여 자기 나름대로 공부한 것 또는 작품(?)을 들고 와 서로 소개, 발표하곤 했다.
그 중에서 유독 박승희는 희곡을 공부하는 사람으로 연극에 대한 관심이 깊었었다. 박승희는 요새 TV에 방영되는 『영친왕 전하』에 나오는 박정양 대감의 둘째아들로 1923년 여름방학 때 귀국하여 7월에 인사동 조선극장에서 「토월회」의 이름으로 제1회 공연을 가졌다. 상연목록은 『길식이』(박승희 작)『곰』(「안톤·체흡」작) 『오로라』(「버나드·쇼」원작 「How he lied to her husband」의 개제) 『기갈』등으로 토월회동인은 물론 당시 「백조」의 동인이던 석영 안석주와 회월 박영희가 찬조출연을 했다.
제1회 공연은 7백원의 부채를 짊어졌을 뿐 아니라 공연도중에 연극사상 처음이라할 일화마저 남겼다.
박승희가 자신이 『오로라』에 주연이라는 것을 맡아서 하다가 말문이 막혀 (대사를 잊어 버려) 그만 막을 내리고 표를 모두 돈으로 물러준 일이 있었다. 그런 경우 가령 백명이 들어왔다면 백명이 다 현금을 내고 표를 산 것이 아니라 공짜로 들어온 사람도 많은데 돈으로 물러줄 때는 벌리는 손마다 소정의 입장료를 되돌려 주어야 하니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셈이다. 이것은 박승희가 아무리 제 철량을 들여서 한 연극이라 하지만 연극 사에 큰 오점을 남긴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공적에 비하면 거론할만한 이야기도 안 된다.
그는 유산3백 석을 연극에 홀랑 털어 바치고 말년에는 오뚝이처럼 혼자 오두커니 선조의 묘 밑에서 묘지기 집 아랫방에서 쓸쓸히 숨졌다.
그러나 그의 무덤에는 「우리나라 신극의 중흥을 일으킨 공로자의 묘」라는 패목하나 없으니 과연 연극이란 시공을 지나면 허무하기 짝이 없는 예술이다.
「토월회」는 일본의 신극의 창시자 소산내훈의 축지 소극장에 한해 앞선 1923년 전국적인 인기를 차지했다.
그것은 「토월회」가 희곡이라는 극본과 연출과 현실적인 건축(장치)과 일상 생활적인 움직임과 일상어 적인 대사의 용어 등으로 비현실적이고 특수(?)한 동작과 발성과 어조로 꾸며지던 신파 연극에 비해서 대중에게 크게 「어필」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임성구 이후 발전하던 신파 연극은 서울은 물론 지방 대도시에서도 발을 붙일 곳이 없어졌다.
「토월회」이후 전국 각지에서 「인텔리」청년들이 극단을 조직해서 비록 조생모사적인 단명일지라도 우후죽순같이 연극에 대한 열이 굉장히 일었다. 「토월회」의 재2회 공연은 「러시아」의 유명한 작가 「톨스토이」의 『카추샤』(부활), 독일의「알트·하이델베르크」(「마이슈텔」작) 등이었고 이어 제3회 공연을 YMCA에서 가진 후부터는 전문극단화 하여 「광무대」를 1년간 계약한 후 『춘향전』을 비롯하여 창작극(민속극) 상연을 주로 했다. 그때『춘향전』의 춘향은 21세의 복혜숙으로 15일간을 속연한 것도 그 당시는 첫 기록이었다.
광무대는 지금의 을지로4가 국도극장이 있는 그 언저리에 일인이 경영하던 황금유원지가 있던 바로 옆의 2층 목조 건물로 협률사(원각사에서 밀려난 구파의 오수·재인들의 모임) 유의 연예를 전문으로 하다가 새로운 연극의 전문극장이 되었다.
이리하여 신파류의 연극과 더불어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연극의 조류는 밀물처럼 밀어닥쳤다. 이러기를 10년 1931년에 역시 일본동경에 유학하여 외국문학을 전공하던 일파가 번역극만을 내들고 「극예술연구회」라는 것을 만들어 1932년 「니콜라이·고골리」작 『검찰관』을 인사동 조선극장에서 상연했다. 이때의 연출을 맡았던 사람은 1930년에 일본 축지 소극장의 창립동인이었던 유일한 조선인 홍해성이었는데 그는 소산내훈의 작고와 함께 극단이 분열되는 바람에 귀국한 것을 계기로 이 작품에 손을 댔던 것이다.
그때의 「멤버」는 홍해성과 윤백남을 받들고 이헌구 이하윤 장기제 김진섭 서항석 최정우 정인섭 함대훈 조희순 유치진 등으로 일명「해외 문학파」라는 별명을 들으며 우리나라 신극운동에 앞장섰었다.
이렇게 쓰다보니 슬며시 연극사가 되는가 싶은데 껑충 뛰어서 동양극장시대로 가자. <계속> 【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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