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71년 벽두의 발언(4)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현대는 『다양의 시대』라고 말한다. 전후시대의 종말과 함께 정치며 경제·사회, 그리고 문화는 바로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고 있다. 이데올로기를 넘는 이른바 다변세계가 국제정세의 새 물결로 접근하고 있으며, 오늘의 세계경제는 빈부의 문제라는 고전적인 국면을 넘어 동서남북의 분별없이 실리위주에 직면해 있다. 흑 아니면 백의 선택을 강요하는 모럴은 한낱 전후의 유물로 전락되고 만 것이다.
민족문화 또는 민족의 주체성이 운위되는 것은 바로 이 다양·다변세계의 한 역설적 현상인 것 같다. 『인류는 한 울타리』라는 환상은 결국 한낱 이상주의에 그치며, 오히려 정체주의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우리는 아폴로위성의 우주정복이 인류의 긍지를 얼마나 주었는지 때때로 회의할 때가 있다.
민족간의 또한 국가간의 내외적문제는 다만 현상의 유지 혹은 흐름속에 맡겨진채 있을 뿐이다.

<민족문화의 주체성>
민족문화의 주체성을 말하면서 흔히 국수적인 독선주의와의 혼동을 면하지 못하는것은 유감이다. 더구나 개방시대에서 그와같은 주장이나 사고는 설득력을 잃은듯한 인상마저 풍길때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호혜평등의 입장을 존중한다. 문화의 깊이와 높은 가치에 철할 때, 한 겨례의 품격은 말할 것도 없으며, 언어와 풍속을 달리하는 타민족과도 감동적인 유대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휴매니티에 호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 의욕적인 지도세력은 근대화를 물량의 개발에서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사려깊은 지식인들은 바로 이와같은 사고나 지도이념에 끊임없는 비판을 가하고 있다. 한국의 지식인 풍토에 의식의 갭을 가져온 것은 근대화에의 지표를 보다 선명하게 찾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역사는 교훈의 박물관이다. 서구의 근대사상은 자아의 발견, 곧 자각에서 비롯된 것을 우리는 근대사에서 가까이 보고 있다. 서구사회가 민주사상의 터를 닦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들은 줄기찬 열의와 투지로써 자유로운 대화를 통한 의사유통을 모색해왔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의사유통의 정체속에서 외래의 격렬한 파도에 직면해 있는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것은 비단 정치·경제의 현실만은 아니다. 인간가치의 발굴에 있어서도 허황된 미몽과 탁상공론에 집착하고 있는 것 같다. 더구나 저마다 무사안일주의의 골방속에서 칩거하며, 자아를 잊고사는 것을 차라리 미덕시하는 풍조는 지극히 무책임한 자기방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현상에서 민족의 이념, 민족의 긍지, 나아가서는 민족의 번영을 운운하는 것은 한낱 공염불일 뿐이다.
위선이 강요되는 사회는 분명 무엇이 잘못되어 있다. 우리는 이 잘못에의 자각을 새롭게 해야할 것이다.

<인간부재 현상의 극복>
최근 우리의 주변에서 인간부재(dehumanization)의 문제가 점차 심각한 테제로 제기되는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간부재의식은 바로 앞에서 지적한 물량위주의 발전관에서 비롯된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속칭 황금만능의 사고따위는 민족적 주체의식을 좀먹는, 모럴의 퇴폐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다. 행동의 자유의지는 인간의 가치와 문화의 바탕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물질에의 집착과 탐욕에 좌우되는 난센스를 빚기 때문이다. 물량주의는 인간을 사상이나 의식의 주체로 보존하기에 앞서, 유행과 획일과 동화의 화신으로 만들기 쉽다. 오늘의 문화의식을 중심을 잃고 허망하기 짝기없는 유운의 그것이나 다름없이 만든 것은 여기에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민중은 역사안에서 또는 역사의 짐을 다만 떠받치는 층으로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에 의하고 있는 사실에 눈을 돌려야 한다. 오늘의 민주사회는 민중의 의지나 원망을 무시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현대가 민중의 시대라는 사실은 바꾸어 말하면 민중자신이 주체적·능동적인 존재로 등장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폐쇄된 방임의 탈피>
우리는 과잉을 다른 누구아닌 자신에게 물을 줄 아는 현명한 민중으로 발전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호랑이 굴속에서도 정신만 차리면…』하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그러나 가장 설득력있는 진리의 일면을 갖고있는 것이다.
우리는 잡다한 역사의 격랑속에서 이제까지 폐쇄된 방임, 자유의 그늘에서의 억제를 체험해왔다. 이러한 모순은 우리들로 하여금 스스로 지키고 가꾸어야할 주체성을 내버려두고 끊임없는 회의와 방황만을 거듭하게 만들었다.
근대화를 지향하며, 이른바 미국식의 물질문명을 선망하며, 민족적 전통을 도외시하는 풍조는 바로 발전의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깊은 의구심만 자아내게 한다.
우리는 새로운 연대의 전개속에서 구태의연한 안일과 미몽을 버리고, 새로운 의지와 활기로써 자각한 민중의 긍지를 지켜야 할 것이다. 새로운 시간은 새로운 기회와 새로운 각오를 일깨워주는데에 값이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