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열사 채권 판매직원에 할당량 … 양심 가책 느껴 사표”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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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그룹 유동성 위기로 채권 투자자들이 가장 큰 잠재 피해자로 떠올랐다. 서울 을지로 동양증권 건물 앞에 빨간색 신호등이 켜져 있다. [뉴스1]

#2010년 말 동양증권에 입사했던 A씨(29)는 요즘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는 서울시내의 한 지점 창구에서 1년 가까이 고객 영업을 하다가 사표를 냈다. 회사 다니는 동안엔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3개월이 멀다 하고 계열사 회사채와 기업어음(CP)을 팔라는 공지가 떴어요. 계열사 사정이 심상치 않다는 건 자연히 알게 됐죠. 채권 만기가 돌아오면 그때마다 새로 채권을 발행해 막곤 했으니까요.” 계열사 어음 발행기간이 되면 스트레스가 심했다. 지점장은 수시로 “다른 상품보다 계열사 채권을 우선 팔라”며 독려했다. 기존 고객에겐 전화를 걸어가며, 창구를 찾은 손님에겐 말을 붙여가며 동양 계열 채권을 권했다.

“양심의 가책이 심했어요. 계열사 실적이 나쁜 게 뻔히 보이는데 … . 위험한 수준이라는 걸 알지만 팔아야 했죠.” 그는 “그때 사표를 낸 게 천만다행”이라고 털어놨다. “적어도 내가 팔았던 채권은 대부분 만기가 돌아왔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손해를 끼쳤다는 자책감은 없다”는 것이다.

#의류회사에 다니는 황모(40)씨는 동양그룹 자금난이 불거지면서 밤잠을 설친다. 지난해 7월부터 조금씩 사 모은 동양그룹 회사채와 CP가 모두 6700여만원어치. 이 중엔 남동생의 결혼자금 1400만원도 포함돼 있다. 처음 채권을 사게 된 건 증권사의 권유 전화 때문이었다. 지점에 갔더니 영업사원은 동양그룹 계열사가 서로 연결된 조직도를 보여 줬다. “지주회사를 중심으로 서로 연결돼 있다고 하더라고요. 한 계열사가 망하면 다른 곳이 도와줄 테니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이후론 아예 휴대전화 문자로만 채권 발행 소식을 듣고 전화로 계약을 체결했다. “동양 계열사가 어렵다는 얘기나, 투자부적격이 된 채권을 10월부터 계열 증권사가 취급할 수 없게 됐다는 얘기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요. 계약 체결 전까지 5분 이상 통화한 적도 없고요.” 계약을 체결하고 나면 우편으로 서류가 왔고, 형광펜 표시가 된 곳에 서명만 해서 보내주면 그만이었다. 그는 “오래 거래한 증권사라 믿었는데 금융자산을 모두 날릴까 두렵다”고 말했다.

전직 영업사원들의 양심 고백
동양그룹이 유동성 위기에 몰리며 계열사 채권에 투자한 개인투자자들이 가장 큰 잠재 피해자로 떠올랐다. 특히 동양증권이 투자 위험성 등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계열사 채권을 판매했다는 사례가 속속 제시되면서 ‘불완전 판매’ 여부가 이번 사태의 뇌관이 될 전망이다. 소비자단체에는 “투기등급으로 꼽힐 정도로 위험도가 높다거나 만약의 사태가 터지면 원금 손실을 볼 수 있다는 내용을 사전에 들은 바 없다”는 투자자들의 민원이 빗발치고 있다.

불완전 판매 정황은 개인투자자가 아닌 동양증권 퇴사자들의 고백에서도 드러난다. 동양증권의 또 다른 서울지점에서 근무했던 B씨(30). 그 역시 어렵게 들어간 회사를 1년여 만인 2011년 말에 그만뒀다. 가장 큰 이유가 계열사 채권을 팔라는 압력 때문이었다는 게 그의 설명.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계열사 채권을 파는 게 어땠나.
“힘들었다. 동양증권 아니면 팔 수 있는 데가 없으니 지점별로 할당이 내려왔고, 자연히 직원별로도 할당액이 있었다. 우리 지점의 경우엔 발행 때마다 수십억원 수준이었다. 나는 신입사원인데도 1억원 이상을 맡아야 했다.”

-잘 팔렸나.
“쉽지 않았다. 투기등급 회사채는 일반인에게 곧이곧대로 설명하면 안 팔린다. 일반인들의 경우 수익은 추구하면서도 안전한 걸 찾으니까.”

-어떤 식으로 팔곤 했나.
“보통 쓰는 논리가 있다. 동양그룹의 다른 계열사들을 언급하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키는 경우가 많다. ‘자금이야 돌고 도는 거니까, 어려워지면 다른 계열사가 사 주곤 한다’는 식이다.”

-불완전 판매 논란이 일고 있다.
“회사 측에서야 각종 투자 유의사항 등이 쓰인 서류를 내밀고 ‘완전 판매했다’고 말하겠지. 거기엔 ‘투기등급이라 위험이 있다는 걸 알고 투자한다’고 적혀 있고, 서명까지 했으니까. 그렇지만 그런 상품을 팔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숨기는 내용이 있다. 내가 생각해도 불안하지만 불안하지 않다고 얘기하는 거다.”

-금융감독원에선 투자자 대부분이 고액 자산가이고 금융지식이 있는 층이라 투자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렇지 않다. 투기등급 채권을 전문적으로 투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은 영업에 나설 필요가 없다. 그걸로 안 되니까 할당을 받고 영업을 하는 거다. 우리는 평소엔 채권 투자를 안 하는 고객들에게 권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개 어떤 고객들이었나.
“우리 지점에는 나이 많은 고객들이 많았다. 대부분 돈은 있지만 채권 구조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수익이 높다’고 설득해 500만~3000만원 정도씩 투자하게끔 했다.”

A씨의 고백도 비슷하다. 그는 “계열사 채권을 팔면서 고객들에게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고 했다.

-어떤 점이 어려웠나.
“팔기 싫은 걸 팔라고 하니까. 위험한 게 보이는데. 나는 그나마 부자인 사람들한테만 권했다. 금융자산이 수억원대인 사람들에게만 말이다. 차마 자산이 1000만~2000만원인 사람한테 그걸 전부 이 채권에 투자하라고는 못하겠더라.”

-그때 심정은.
“그때만 해도 만기 때 자금이 막힐까 걱정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동양증권에 남아 있는 친구들은 술만 마시면 걱정하더라. 만기에 자금이 제대로 들어올지 모르겠다고. CP 만기가 3개월이니, 3개월마다 그렇게 피가 마르는 셈이다.”

-동료들은 어땠나.
“영업직 동기들은 반 정도가 회사를 나갔다. 계열사 채권을 파는 스트레스도 있었겠지만 그룹 전체가 오래 못 가겠다는 생각이 드니까 그런 것 같다.”
 
돌려 막기 방치한 금융 당국 … 책임론 대두
계열사 채권을 팔라는 공공연한 압력. 고객들에게 “그룹 전체를 믿고 투자하시라”고 권했던 증권사 직원들. 2011년 은행 대출을 줄여 주채무계열에서 벗어난 동양그룹은 이렇게 계열 증권사를 활용해 개인투자자 자금으로 회사채와 CP의 ‘돌려 막기’를 해 왔다. 주채무계열은 금융권 전체 대출 중 0.1% 이상을 빌린 기업집단을 주 채권은행이 통합 관리하기 위해 만든 제도. 주채무계열로 지정되면 계열사 간 지급보증에 대한 규제가 심해진다. 금감원 관계자는 “주채무계열로 지정되면 재무구조를 개선하라는 은행 압박이 심하다”며 “이런 간섭을 받기 싫으니 은행 여신을 줄이는 대신 회사채·CP로 자금 조달에 나선 것”이라고 말했다.

신용등급이 낮은데도 개인투자자를 끌어모을 수 있었던 건 동양증권의 일사불란한 판매 지원 덕이었다. 8월 말 현재 동양그룹이 발행한 회사채와 CP는 모두 2조2000억원. 이 중 73% 수준인 1조6000억원어치가 동양증권 창구를 통해 판매됐다.

채권 판매량의 90% 이상은 4만9000명에 달하는 개인투자자가 떠안았다. 무분별한 채권 발행과 계열 증권사를 통한 판매를 금융 당국이 제대로 감시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장화식 사무금융노조 사무처장은 “위험성이 높다는 걸 알면서도 계열사를 돕기 위해 채권 판매를 장려했다면 개인투자자들을 대놓고 속였다고밖에 볼 수 없다”며 “이에 대해선 금융 당국도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회사가 요건에 맞게 채권을 발행하는 걸 막을 근거가 없는 데다 증권사가 관련 서류를 갖춰 판매한 채권을 불완전 판매라 볼 수도 없다”며 “그런 식으로 자금 조달을 막았다간 금융 당국이 회사 죽인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았겠느냐”고 해명했다.

동양증권 측은 “아직 만기가 되지 않아 부도가 난 상황도 아닌데 불완전 판매 여부를 따지는 건 시기상조”라며 공식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동양증권의 한 관계자는 “ 불완전 판매 여부는 손실이 확정될 경우 소송을 통해 건별로 판가름 낼 문제”라며 “회사 차원에서 계열사 채권을 우선해 팔라는 지시를 내놓은 적은 없다. 직원별 판매 목표량은 있지만 계열사 채권에 대해 따로 그 목표를 세워놓진 않는다”고 주장했다.

임미진기자 mi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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