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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한 삶 속에서도 위로와 희망 건네던 분 … ”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8일 오전 명동성당에서 열린 고 최인호 작가 장례 미사에서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왼쪽)가 고인에게 성수 살포 및 분향을 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이 세상 떠난 형제 받아 주소서~. 먼 길 떠난 형제 받아 주소서~.”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28일 오전 9시 서울 중구 명동대성당. 오르간 연주에 맞춰 가톨릭 성가 ‘이 세상 떠난 형제’의 합창이 울려 퍼지자 소년처럼 웃고 있는 고(故) 최인호(세례명 베드로) 작가의 영정 사진이 제대 앞으로 옮겨졌다. “주님을 바라고 믿었던 그가 본 고향에 돌아가 영원한 평화를 누리게 하소서”라는 기도문이 낭독된 뒤엔 분위기가 더욱 경건해졌다. 침샘암으로 25일 세상을 떠난 작가를 기리는 추모미사의 시작이었다.

이날 미사엔 가족·지인 등 600여 명이 참석, 고인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눴다. 뮤지컬 연출가 윤호진, 가수 김수철, 피아니스트 노영심, 소설가 김연수·한강, 시인 김형영 등 문화계 인사뿐 아니라 평소 최 작가의 투병 생활을 안타깝게 지켜봤던 신자들도 함께했다. 시작 40분 전부터 자리를 잡고 앉아 미사포를 쓰고 기도하는 이도 있었다. 김태순(58·서울 개포동)씨도 “평소 주보를 통해 작가님의 깊은 신앙심에 감동을 받아 왔다”며 “마지막 길을 축복해 주고 싶어 미사에 참석했다”고 말했다. 1987년 가톨릭에 귀의한 고인은 암 투병 중에도 서울대교구 ‘서울주보’에 자신의 묵상을 연재해 왔다.

미사는 생전에 작가와 깊은 친분을 맺어 온 정진석(서울대 교구) 추기경이 집전했고 말씀의 전례-성찬의 전례-고별 예식의 순서로 약 1시간10분 동안 진행됐다. 이날 정 추기경은 강론을 통해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한국 문학계에 굵은 획을 그었던 고인의 삶을 기렸다. 그는 “최인호 베드로 작가는 삶을 통찰하는 혜안과 인간을 향한 애정이 녹아 있는 글을 쓰면서 많은 국민에게 사랑을 받았던 이 시대 최고의 작가였다”고 회고하면서 “거칠고 험한 삶 속에서도 위로와 희망을 건네던 선생님을 이제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슬픔을 감출 수 없다”고 애도했다.

그는 작가와의 마지막 순간도 소개했다. 23일 직접 집전한 병자성사(병자나 죽을 위험에 있는 환자가 고통을 덜고 구원을 얻도록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는 성사)에서였다. “선생은 병자성사를 마치고 활짝 웃으면서 무언가 이야기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때 비로소 하신 말은 ‘감사합니다’였다. 나는 그분이 평생 만난 사람에 대한 응답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그는 “‘감사합니다’란 말은 반대로 우리가 선생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라고 덧붙였다.

영성체 의식을 치른 뒤엔 고별사가 이어졌다. 가톨릭 신자이자 작가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 ‘고래사냥’의 주인공이었던 배우 안성기씨가 했다. 안씨는 고인을 ‘인호 형님’이라고 부르며 “너무 서둘러 저희 곁을 떠나신 것이 조금은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함께 살아온 날들이 참으로 행복했고 감사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고인이 남긴 가르침 중 하나를 회고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던 질문이었다. 그는 너무 답이 뻔하다고 생각했지만 고인의 해석은 달랐다고 했다. “적이나 나쁜 사람은 원수가 될 수 없다. 안 보면 그만이니까.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 아내·남편·자식·부모를 열심히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는 “형님의 말씀이 아직도 제 가슴에 식지 않고 고스란히 살아 있다”고 고인을 추억했다.

그는 고인이 세상을 떠나기 보름 전인 10일 아내 황정숙씨에게 구술한 짧은 글을 낭독하며 고별사를 마무리했다. “먼지가 일어났다. 살아 있다. 당신은 나의 먼지. 먼지가 일어난다. 살아야 하겠다”는 시 같은 문장이었다.

미사 뒤에 만난 안씨는 이 글에 대해 “끝까지 살고자 했던 형님의 의지가 느껴진다”며 “완연한 병색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어 하지 않던 형님 뜻을 따르느라 지난 1월에 만난 게 마지막이 돼 버렸다”고 애통해했다.

고별사에 이어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대주교가 주례하는 고별 예식(관에 성수를 뿌리고 분향하는 의식. 고인의 죄사함을 구하는 예식이다)이 행해졌다. 마지막 성가가 흐르자 훌쩍이는 소리도 점차 커져 갔다. 이윽고 성당 밖으로 운구가 시작되면서 일부 추모객은 통로로 나와 관을 한 번씩 만져 보며 아쉬움을 달랬다. 고인은 이날 경기도 성남시 분당 메모리얼파크에 안치돼 영원한 ‘별들의 고향’에 잠들었다.

1945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울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1963)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되며 등단했다. 『별들의 고향』 『겨울 나그네』 『불새』 『깊고 푸른 밤』 『도시의 사냥꾼』 외에 역사·종교에 바탕을 둔 『길 없는 길』 『유림』 『상도』 『해신』 등 무수한 히트작을 50년간 써오며 ‘영원한 청년 작가’로 불려왔다. 2008년 침샘암이 발병한 뒤에는 손·발톱이 빠지는 고통에 맞서 골무를 끼고 집필하는 투혼을 보였다. 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2011) 외에 묵상 이야기를 담은 산문집 『하늘에서 내려온 빵』(2008) 『최인호의 인연』(2010) 『천국에서 온 편지』(2010) 등이 그 때 나온 책들이다. 이러한 고인의 활발한 창작열과 한국문학 발전에 이바지한 공적을 기려 정부는 27일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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