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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 기자의 히말라야 사람들 ③] 마칼루 베이스캠프에서 만난 대장장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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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면

지난 봄 네팔 북부 마칼루(8463m) 베이스캠프(4800m) 가는 길의 세두와(2500m)마을을 지날 때다. 허름한 대나무 발 아래 두 노인이 앉아 있었다. 만바두르 카미(64·사진 왼쪽)와 락파 딘딘 셰르파(53). 외모가 우리와 흡사해 불현듯 27년전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발걸음을 멈춰 대나무 발 아래로 들어갔다. 아주 오래된 동네 친구 둘이 그늘 아래서 소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서 보니 아니다. 카니는 대장장이, 락파는 손님이다.

세두와 마을은 겨울에도 눈이 오지 않는 따뜻한 지역으로 트레커들이 몰려드는 봄에는 무덥다. 땀을 뻘뻘 흘리며 설산으로 향하는 중, 두 노인은 무더운 한낮에 길거리에서 숯을 피워놓고 마주앉아 있었다. 나이는 들었지만 락파 노인의 팔뚝은 핏줄이 도드라져 있다. 종아리도 단단하다. 발아래 놓인 목발도 심상치 않다. 왠지 강호를 떠나 재야에 묻혀 사는 무림의 고수들처럼 보였다. 가서 보니 쇠로 된 농기구를 수선하고 담금질하는 간이 대장간이었다.

숯을 피워 풀무질을 하는 만바두르 카미(64)는 떠돌이 대장장이다. 쇳물을 녹여 연장을 만드는 게 아니라서 대장장이보다는 장돌뱅이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네팔의 고산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면 이렇게 이 마을 저 마을을 떠돌며 밥벌이를 하는 이들을 수시로 만난다. 그릇장수 땜장이 등이다.

간이 대장간은 참 재미있다. 손수 엮은 대나무 발로 지붕을 얹은 초막 안에는 황토를 짓이겨 만든 흙구덩이가 전부였다. 갖고 있는 연장은 크기가 다른 망치 2개와 펜치 1개, 그리고 쇠를 두드릴 때 받침으로 쓰는 무쇠덩어리. 보퉁이에 모든 연장을 다 집어넣는다 해도 그리 무거울 것 같지 않다. 장돌뱅이 보퉁이치고는 맞춤이다.

쇠를 달구기 위해 군불을 때는 방법도 단출하다. 풀무에서 일으킨 바람은 흙구덩이를 통과해 숯을 발갛게 달궜다. 바람이 빠져나오는 구멍은 어린아이 고추처럼 작게 만들었다. 풀무를 서서히 돌려도 압축된 바람 덕에 숯이 금방 달아올랐다. 조악하지만 과학적이었다.
카미는 숯이 적당히 달궈지면 낫이나 농기구를 그 위에 올려놓았다. 숯의 상태가 썩 좋지 않았기 때문에 불을 끌어 모아 낫을 덮었다. 마치 군고구마를 묻어놓은 것만 같았다. 잠시 쉬는 시간, 카미는 이때 옆구리 춤에 넣은 담배를 말아 피웠다. 달콤한 순간은 딱 담배 한 대 정도, 그리고 발갛게 달궈진 쇳덩어리를 두드려 담금질을 했다.

카미는 네팔 노인치고는 장수하는 편이다. 이들은 평균 수명은 대개 50~60살사이다. 굶은 주름이 가득한 카미의 얼굴은 마치 소설 속 주인공이 떠올렸다. 처자식을 잃고 홀로 살아가는 가마 굽는 노인...그럴싸한 사연이 있을 것만 같은 노인의 얼굴이었다. 의사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묻지 못하고 있다, 뒤따라온 가이드 크리슈나가 합류해서 통역을 해줬다.

“13살 때부터 대장장이 일을 했다. 이 마을에 온 지는 두 달이 됐다. 잠은 초막 아래 민가에서 방 한 칸을 빌렸다. 마칼루 사이트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농기구를 수선해주는 일을 한다. 시장에서 일하고 싶지만, 돈이 없어 가게를 낼 돈이 없다. 간신히 풀칠할 정도의 돈을 벌고 있다”
마침 등교 시간인지라 아이들이 책보자기에 농기구를 담고 와서는 이곳에 퍼놓고 갔다. 열 살 남짓의 소녀들은 뜻밖의 외지인이 있어 부끄러웠는지 농기구를 내던지듯 하고 내뺐다.

아이가 가고 나니 한 노인이 수선한 농기구를 찾으러 왔다. 수리비를 정산하는 과정이 볼만하다. 보자기에 감자를 싸와서 땅바닥에 풀어놓는다. 그런데 감자가 아주 실하다. 고산 지역의 감자는 씨알이 작은데, 농사지은 것 중에 가장 실한 놈으로 가져왔나보다. 감자를 보고 카미는 고개를 까딱까딱했다. ‘그만하면 됐네’ 이런 뜻일 게다.

마칼루베이스캠프에 갔다 내려오는 길, 만바두르 노인은 여전히 그 곳에 있었다. 한 마을에 일주일도 있고, 열흘도 있고, 있고 싶은 대로 있다가 가고 싶을 때 다른 마을로 이동한다고 했다. 그야말로 노마드(Nomad) 장돌뱅이다.

‘김영주 기자의 히말라야에서 만난 사람’은 김영주 일간스포츠 기자가 히말라야에서 마주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는다. 김영주 기자는 지난해 6월부터 해발 8000m가 넘는 히말라야의 14개 봉우리의 베이스캠프를 차례로 걷고 있다.

김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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