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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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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실과에도 차등이 있어서 종묘의 천신물목에 드는 것을 으뜸으로 친다. 능금·배·감·복숭아·귤 등은 그중에도 중요한 품목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유득공의 경도잡기에 의하면 배는 황해도 황주·포산에서 나는「추향」을 치고 감은 수원인근의 남양과 안산에서 나는 길쭉한 곳감「용화」를 좋은 것으로 꼽았다. 귤과 유자 및 석류는 제주와 남도지방의 산물이고, 서울에서는 석류를 화분에 기르는 일이 매우 성행했다. 그리고 복숭아는 털이 없는 것을「승도」라하고 울릉도의 큰 복숭아씨로 키운 것을「울릉도」라 하여 명물로 여겼으며 대추는 보은 것이 역시 대견하다.

<청에 인질간 세자에 보내고>반세기전만 하여도 서울 근교에는 보과밭이 퍽 많았다. 자하문 밖의 능금과 앵두, 남산 동남 기슭의 복숭아, 소사의 배, 광주의 자두, 양주의 잣 등 모두 유명한 것인데 지금은 도시에 밀려 아주 귀해졌거나 혹은 없어져 버렸다.
이런 실과들을 생각하면 문득 두고 온 고향을 연상케 된다. 울타리 너머로 주렁주렁 열매가 익어가는 과목을 바라보노라면 새삼 가슴을 조이곤 하던 광경이 선연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시골에는 우리나라의 토종 과실들이 더러 있고, 또 가정마다 제상에는 곶감·대추·밤·사과·배·호두·은행·잣 등을 기본 제물로 쓰고 아이들은 으레 차례가 끝나기를 군침을 삼키며 기다린다. 뿐만 아니라 실과에는 온갖 일화와 역사가 맺히어 있다.
병자호란 때 일이지만 청나라의 침공을 받아 조선왕 인조는 기어이 유태종에게 항복을 하고 아드님 현제 소현세자·봉림대군이 인질로 만주땅 심양성에 끌려가니 서울에서 심양까지 2천릿길에 인파가 끊일 사이 없이 연락이 잦았다. 『심양일기』인조 16년 12월21일조에 보면 때마침 서울에서 홍시가 도달했다.
아버님 인조가 두 아드님을 위하여 보낸 것이니 만주에서는 얻어볼 수도 없는 실과이다. 때마침 순찰을 나왔던 청나라의 용골대라는 장군이 보고 다가섰다. 『이것이 무엇이냐.』『홍시요] 『이걸 먹는가?』 『달고 시원하오』한 개를 맛본 용골대는 맛이 얼마나 신기했던지 당장 소리를 쳤다.
『이렇게 진귀한 것을 너희들만 먹다니 괘씸하구나. 어서 우리 황제 폐하께 헌납을 하라. 』 그리하여 다시 서울에 기별해 홍시 1만개, 배(생리) 6천개를 가져다 바쳤다 했으니 2천릿길에 터지기 쉬운 홍시 1만개를 실어갈때 그 고초는 대단했을 것이다.
얘기가 났으니 말이지만 감은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실과요, 특히 8월에 홍시와 10월에 건시, 두번씩이나 천신상에 오르게 되니 그 지체는 대단하다. 다른 실과는 익는대로 한번 먹으면 그만이지만 감만은 아주 다채롭다.
초가을 감이 불그레해지면 우선 따서 소금물에 침을 담가 떫은맛을 우러내고 깎아서 먹는다. 이것을 침감(심포) 이라고 한다. 첫서리가 내리고 감이 한창 익어갈 때 쯤해서 하나 하나 곱게 따서 목단에 짚을 두둑이 깔고 줄지어 재어두면 한겨울네 먹게되는데 이것을 연포라 하고 빛이 빨개서 홍시라고도 부른다.
감이 한창 익어갈 무렵 감을 따서 껍질을 벗겨서 말리면 건시가 되는데 속담으로는 고(곳)감이라고 한다. 그래서 감은 침감·연감·곶감 세 가지로 먹으니 실과 중에서는 가장 여러모로 쓰이는 것이다. 뿐더러 정월초승 세찬상에 청량음료로 등장이 되는데 그것을 수정과라고 한다.
건시를 생강 우린 물에 담가서 한창 불어날 때, 설탕을 치고 계피가루와 잣(실백)을 얹어서 마시면 달고 시원해서 좋다.
길고 긴 겨울밤에 둘러앉아서 고대소설이나 읽다가 목이 컬컬할 때 찬광에 재어둔 감을 꺼내다 한 개씩 먹으면 얇은 껍질 속이 무르녹은 얼음단지가 돼서 그 시원한 맛이야말로 먹어본 사람만이 안다고 했다. 보나마다 그 종류가 가지가지이지만 감은 더욱 가지각색이다.
그 중에서 제일로 치는 것은 수시라지만 「떡감」이라는 것도 있어서 물기가 없고 달지도 않아 그 맛은 마치 떡을 먹는 것 같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주어진 것이다. 감은 모양도 동글 넓적한 것을 치지만 장존이라는 준시는 알이 굵고 높이가 우뚝해서 한 개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 다만 물기가 없어서 시원한 맛이 적다.

<명산지는 경상·전라도>제상에 실과를 늘어놓을 때만 해도 홍동·백서라 해서 붉은 빛 나는 실과는 동쪽에 놓게 마련인데 동쪽이 상석이니 감은 자연 수석에 자리잡는 제물이 아닐수 없다. 감은 본시 따뜻한 곳에 잘 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추풍령 남쪽에서 잘되니 경상도 풍기를 명산지로 일컫지만 그것은 몇 그루 준시를 일컫는 것일 뿐. 『동국여지승경』에 나온 풍기군에는 곶감이 토산으로 나타나 있지 않으니 풍기는 곶감의 명산지가 아니라 집산지인성 싶다.
어쨌든 감이 잘되는 고장으로는 경상도 전라도가 으뜸이요 충청도 강원도 경기도에서도 감이 열리기는 하지만 시원치 않다. 더우기 개성을 지나 더 올라가면 감나무가 더러는 있지만 기후가 차서 튼실한 열매는 열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벌판에 이르러서는 감을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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