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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에세이] 마셔본 만큼 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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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4면

유럽에 주재했던 경험 때문에 와인에 관심을 가져 즐기게 되고 가정의 식탁에도 와인을 빈번히 올리다보니 어울리지도 않게 와인 애호가라는 말까지 듣는다.

주위에서도 와인을 곁들여야 할 자리가 있으면 으레 와인 선택을 내게 맡기며 굉장한 와인 전문가나 되는 듯 대접해준다. 그러나 와인 마시기를 계속 즐겨왔을 뿐 전문가의 근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나의 실체다.

우리나라에선 와인 생산국들과는 와인에 대한 관념이 다를 수밖에 없다. 식사에 기꺼이 곁들이는 음료가 아니라 낯선 외국의 술, 그것도 고가의 수입품이었다.

더욱이 와인은 일상적으로 우리가 먹는 한식과는 조화시키기가 쉽지 않아서 식탁을 통해 친숙해지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다른 유럽 문명과 마찬가지로 책을 통해 지식으로서 흡수될 수밖에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기가 쉽지 않고 공연히 어려운 대상으로 인식된 것이다.

와인에 처음으로 흥미를 갖기 시작하는 사람이 부닥치는 문제는 어떤 와인을 마셔야할지 선택하는 일이다. 와인의 종류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와인을 생산하는 나라가 다양한 데다 포도 품종, 지방, 마을 그리고 양조장으로 계속 분류돼가니 과연 어떤 와인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하기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일생을 살면서 그 많은 와인 가운데 몇 가지나 마셔볼 수 있으며 또한 그 맛을 식별해가면서 즐기겠는지를 생각해 보면 머리만 아파질 뿐이다.

나의 경우 여태까지 마셔본 와인이라야 그 종류가 뻔하고 더구나 맛을 일일이 식별한다는 건 어림도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품종의 차이에서 오는 특징 때문에 메독의 좋은 와인이 어떤 건지 혹은 버건디나 로오느의 시라계통, 스페인의 리오하, 터스카나의 상지오베제 등의 종류와 숙성 여부를 겨우 겨우 식별할 수 있을 정도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처음으로 와인과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어떤 와인을 마시는 것이 좋은지를 얘기해보려 한다.

기본적으론 음악을 많이 들어야 알게 되고 그림을 많이 보아야 이해하게 되듯이 와인도 기회가 있는대로 자주 마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횟수와 경험을 쌓아나가면서 자신이 선호하는 향과 맛의 계통을 찾아내고 그 맛을 자유롭게 즐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와인에 대한 남의 평가에는 신경쓸 필요도 없다. 자신이 즐긴 맛과 기호를 바탕으로 선택의 폭을 넓혀나가면 된다.

그러기 위해선 국가별.지방별, 그리고 품종별로 구분해서 저렴한 보통의 와인부터 마시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외국 여행시에는 가능한 한 그 지방의 와인, 그것도 테이블 와인 정도를 곁들이는 게 도움이 된다.

이러한 경험을 쌓아나가는 동안에 자연히 지방별.품종별로 와인의 특성을 익히게 되고, 어느 정도 구별이 가능하게 되면 상급 와인으로 진입하기에 무난한 때가 됐다고 볼 수 있다.

국내에서라면 와인 가게에서 저렴한 와인을 직접 사다가 집에서 마시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경제적인 데다 테이블 매너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맛을 음미할 수 있어서 더욱 좋다.

그리고 한 와인가게를 정해놓고 자주 다녀 단골이 되면 값도 깎아주고 여러 가지 참고가 되는 조언을 들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김명호 한국은행 전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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