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소도 … 유머도 … 역시 우디 앨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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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 앨런

‘블루 재스민’(원제 Blue Jasmin, 25일 개봉)은 팔순을 바라보는 감독 우디 앨런(78)의 44번째 장편영화다. 그의 최근작 중 단연 주목된다. 지난 몇 년 간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2008), ‘미드나잇 인 파리’(2011), ‘로마 위드 러브’(2012) 등 유럽 도시에 앵글을 맞췄던 우디 앨런. 그가 오랜만에 자신의 고향인 뉴욕으로 돌아왔다. 매력적인 캐릭터, 소소한 유머 감각이 돋보이고 생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서늘하고 날카롭다.

 뉴욕에서 상위 1%의 삶을 누리던 재스민(케이트 블란쳇·사진 오른쪽)은 재벌 남편 할(알렉 볼드윈)과의 결혼생활이 파탄 나자 쪽박 찬 신세로 전락한다. 방 한 칸도 마련할 길 없는 그의 궁여지책은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이복동생 진저(샐리 호킨스)의 집에 얹혀사는 것.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재스민은 여전히 허영덩어리다. 샌프란시스코행 항공권을 일등석으로 끊고, 얹혀사는 주제에 동생 진저를 ‘루저의 삶’이라며 비아냥댄다. 전과 비교해 너무도 비루한 하루하루를 견디던 그에게 이윽고 재기의 기회가 찾아온다. 파티에서 우연히 만난 외교관 드와이트(피터 사스가드·왼쪽)가 그에게 호감을 표하고, 재스민은 그를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영화는 재스민의 현재와 과거,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을 넘나들며 진행된다. 소박한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과 화려한 뉴욕 햄튼의 간극만큼이나, 너절한 현실과 우아한 과거가 대비된다. 재스민이 얼마나 여왕처럼 살았는지, 그에게 풍요를 제공하던 남편은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 재스민과 진저의 관계는 어땠는지가 하나하나 드러난다. 재스민의 현재는 완벽하게 슬픈 자승자박이다. 제 삶의 문제점을 들여다본 적 없고, 오로지 거짓말과 회피로 버텨왔던 이의 초라한 말로다.

 감독은 이런 재스민을 동정할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인다. ‘미드나잇 인 파리’ ‘로마 위드 러브’에서 보여줬던 말랑말랑한 낭만이 ‘블루 재스민’에는 없다. 행복하다가도 절망에 빠지고, 불행하다가도 한 줄기 빛을 발견하는 삶의 새옹지마가 재스민이라는 필터를 통해 덤덤하고 냉정하게 펼쳐질 뿐이다. 영화는 빛 좋은 개살구인 재스민과 초라해 보여도 진실한 진저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나은 삶인지 생각하게 한다.

 모든 게 제자리를 찾는 듯 보일 때 다시 뒤통수를 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감독의 전작 ‘매치 포인트’(2005)와 ‘환상의 그대’(2010)를 떠올리게 한다. 인생에 대한 씁쓸한 조롱을 블랙 코미디로 버무리는 우디 앨런 특유의 감성을 사랑하는 팬들에게 안성맞춤이 되기에 충분하다.

 케이트 블란쳇(44)의 놀라운 연기는 재스민을 연민과 조롱의 양가적인 감정으로 바라보게 한다. 지적이고 기품 넘치는 모습부터 정신을 살짝 놓아버리고 쉴 새 없이 주절대는 모습까지 흠잡을 데 없이 소화해낸다. 그런 재스민을 진심으로 안쓰러워하고, 때론 동경하는 진저를 연기한 샐리 호킨스(37)도 든든하다. 상영 시간 98분. 15세 관람가.

이은선 기자

★ 5개 만점, ☆는 ★의 반 개

★★★★(허남웅 영화평론가):막장드라마와 자극적 묘사에 그치지 않는다. 냉소 가득한 웃음과 삶의 정수를 때리는 통찰.
★★★★(장성란 기자):인간은 찬란했던 과거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인생의 비극을 끝까지 밀고 가는 감독의 꼬장꼬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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