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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제자는 필자|신여성교육(7)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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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유행과 학원>
이화처럼 「미션」계의 여학교가 일반여학교보다 아무래도 개화문명을 재빨리 받아들인 것만은 틀림없었던 것 같다. 우선 영어공부만 하더라도 일반학교에서는 1주일에 3시간 수업한데 비해 이화는 6시간씩 배웠으며 각종 교내 활동도 앞장섰다.
내가 이화학원에 다닐 때인 1913년 때만 해도 기숙사에는 목욕탕 시설이 돼 있었으며, 군입질에 기껏 호떡이나 눈깔사탕 등을 사먹던 시절이었으나 「크래커」같은 서양과자들도 가끔 먹을 수 있었다. 비누가 귀해 가정에서는 콩깍지를 태운 재를 시루에 넣고 물을 내려보내 나오는 잿물로 빨래를 했거나 집에서 만든 팥비누, 녹두비누 등으로 세수를 할 때였으나 기숙사에는 미국에서 들여온 이른바 「양비누」를 사용하기도 했다.
일반 가정에서는 심지어 지붕에서 떨어지는 미끈미끈한 빗물로 먼저 빨래를 한 뒤 솥에다 삶고 또 빨래하는 편이어서 흰옷을 주로 입어 빨래 일이 많았던 당시 처녀들에게 양비누는 절대적인 인기였다.
1911년에 체육교사로 부임한 이래 만11년 동안 이화에 재직한 미스 「제니트·월터」는 여러 모로 한국여성의 개화에 힘쓴 분이다. 당시 여학생들의 체조시간에는 치마끈이 큰 골칫거리였다. 치마 끝으로 가슴을 죄어 매던 재래식 치마는 걸핏하면 줄줄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미스·월터」는 이 치마를 어깨 허리치마로 고쳐 만들고 저고리 길이를 길게 하여 편리한 복장으로 만드는 등 여성들의 보건 위생 개선에도 큰 공헌을 했다.
그때 항간에서는 『모든 유행은 이화학당이 만든다』는 유행어가 날 만큼 이화학생의 몸가짐을 선망의 눈으로 지켜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구습에 젖은 계층으로부터는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내가 대학과에 다닐 때인 어느 가을, 한번은 아무렇지도 않은 무명옷을 입고 종로거리를 지나가려니까 웬 부인 한사람이 느닷없이 다가서 내가 입고 있던 치마꼬리를 들춰보며 『옷감이 아무 것도 아니군』하며 비꼬던 일이 생각난다. 나는 그때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 「프라이」당장, 「아펜셀러」교장 등은 항간의 소문을 두려워 해 비단이나 명주 등 비싼 옷을 해 입지 못하도록 학생들에게 엄격히 단속했었다.
개화에 앞장 선 탓으로 이화의 초기 출신 가운데 우리 나라에서 제일 먼저 외국유학을 간 하난사 선생(1896), 제일 먼저 미국에서 의학박사가 된 박「에스터」선생(l900), 신식결혼의 개척자 최활난 선생(1915), 「금주가」를 작곡한 최초의 여성작곡가 임배세(1918), 최초의 여성잡지 「신여자」의 편집인 김원주 선배(김일엽 스님·중등과8회 졸), 그리고 최초의 여자철학박사이며 국제회의 참가여성이며 문학작품의 해외소개자이기도 한 김활난 선배 등이 배출되었다 할 것이다.
당시 봄·가을마다 가던 소풍도 이화학당만은 어김없이 갔다.
이때는 학생 수도 그리 많지 않았으나 선생들도 대학과니 중등과니 구별 없이 과목을 맡아왔기 때문에 학당 전교생이 한 곳으로 몰려갔다.
교통이 불편할 때라 멀리는 가지 못하고 대부분 홍릉으로 전차를 타고 갔는데 전차를 10대 대절하여 서대문에서 동대문까지 타고 간 뒤(당시는 이 노선밖에 없었다) 걸어서갔다.
그때 청량리 밖은 집 한 채 볼 수 없을 정도의 허허벌판에 소나무 숲이 우거져 많은 학생이 어울려 놀기에는 안성마춤이었다.
숙감 아주머니(식모)가 음식을 만들어 커다란 보따리에 싸서 이고 갔으므로 학생들은 빈손으로 가면 되었다.
전차 안에서 학생들은 『왔네. 왔네, 봄이 왔네』하는 노래를 큰소리로 합창하며 신을 내어 길가는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는 정도였다.
짧은 놀이시간이었지만 이화학생의 소풍놀이엔 짝맞추기·공치기·노래하기 등 그때만 해도 선구적인 각양각색의 「레크리에이션」이 선교사들의 지도로 베풀어졌다. 이화의 소풍놀이는 가장 재미나는 것으로 알려진 때이었다. 자유시간은 1시간 남짓이 있었으나 대개는 「사랑하는 사이」끼리 숨바꼭질을 하며 놀았다. 「레크리에이션」의 지도는 주로 김활난 정애식 박인덕(대학과3회) 임배세 신준여(대학과4회·재미) 이은혜 박「마리아」 김영의씨 등이 대대로 맡아 해왔다 할 것이다.
특히 김활난 선배는 활동의 폭이 매우 넓어 사랑하는 언니 동생이 여러 명씩이었으나 대부분은 1, 2명 정도씩이었다.
이같은 사이는 새로 입학하는 학생가운데 마음에 드는 학생을 골라 맺는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시골에서 올라온 후배들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사감이 정해주는 경우였다. <계속> 【서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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