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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적치하의 3개월(12)|「6·25」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전쟁 3년|강제 모병(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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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공식 기록이나 자료가 없기 때문에 북괴가 남한에서 도합 얼마나 소위 의용군을 뽑았는가는 알수가 없다. 그러나 본 연재 98회에 보도된 김남식씨 증언에 따르면 충남에서는 도합 2만3천명을 모병한 것이 밝혀졌으므로, 이것을 표본으로 인구비례에 따라 전체계산을 잡을 수는 있다. 이 계산에 의하면 서울·경기·강원·충남-북·전남-북·경북 일부 등, 적 치하에 들어갔던 지역에서 약15만명의 인적 자원이 북괴에 의해 전투원으로 동원됐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이 실제로 북괴군의 전투력에 얼마큼 보탬이 됐는가는 극히 의심스럽지만 그래도 동원 총수자는 북괴가 남침할 때 보유한 총 병력과 거의 맞먹을 만큼 방대했다. 그들이 불과 3개월간에 이렇게 많은 수의 인적자원을 긁어모았다는 것은 한마디로 아래로는 15세 미만의 어린 소년서부터 위로는 50가까운 초로의 장정까지를 무자비하게 강제 징집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전세가 불리해지자 훈련도 제대로 안 받은 이들 신병을 대군 전선에 투입하여 많은 희생자를 내게 했다.
다음 증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의용군」의 시말은 비극으로 아롱지어있다.

<강당에 모아놓고 자원 강요>
▲현영진씨(당시 덕수중학2학년·현 중앙일보기자·34) 『나는 그때 15세의 소년이었는데 하마터면 「의용군」에 잡혀갈 뻔했어요. 학교에 세번 나가봤는데 못 보던 녀석들이 상급생이라면서 학생들을 강당에 모아놓고 괴뢰군가를 가르치고 상급생을 의용군에 끌어넣고 합디다. 겁도 나고 기분도 나빠, 그 다음부터는 학교에 안가고 집 앞에서 동네아이들과 공치기를 하고 놀았는데 8월 중순의 어느 날 세 청년이 「동무 좀 봅세다」면서 나를 붙잡아요.
그 길로 연건동 인민위로 끌고 가더니 「동무 평양 가서 군인 되어 공 세우라」고 합디다. 가만히 생각하니 의용군에 끌고 갈 수작이 분명해요.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막 끌어갈 때거든요. 나는 한 꾀를 냈읍니다. 「우리 집이 바로 이웃 동네인 연지동인데 아버지한테 이야기하고 나가더라도 우리 동인민위를 통해 나가겠다」고 했더니 우리 동회로 같이 가 줍디다. 우리아버지가 「이런 어린애를 어떻게 군에 데려가느냐」고 호령호령해서 일단 무러 나왔어요. 그 길로 피신하고 일절 밖에는 나가지 않았지요. 수복 후 알아보니까 내 나이 또래의 덕수 중학 학우들이 몇 명 의용군에 잡혀갔더군요.』

<경인전투에 대부분 투입>
▲박상민씨(당시 일신국민학교 교사·현 모회사 간부·43)
『나는 9월3일에 가두검색에 걸려 그 길로 훈련소인 바로 내 직장이었던 일신교로 끌려갔읍니다. 한2천명되는데 그 중에는 충북 진천에서 왔다는 순「핫바지」 농민들도 한5백명 돼요. 공습경보가 잦으니까 훈련은 엄두도 못 내고, 군가만 가르칩데다. 때로는 20안팎의 젊은 「빨치산」들이 소위 사상학습이라는 것도 시키는데 내용이 너무 어렵고 교조적이어서 귀에 안 들어오더군요. 좀 배웠다는 내가 그랬으니 시골서 온 농민들에야 쇠귀에 경 읽기지요.
첫날부터 입소자들을 대졸·중졸·소졸·문맹 등 네 층으로 분류해서 수용하더니 매일 밤 어디선지 괴뢰군 장교들이 와서 대졸자들부터 차례차례 데리고 나가요.
군복도 안 입히고 모두 맨손들이지요. 나는 소졸이라고 속여 며칠 더 있다가 9월8일인가 밤에 탈출해 나왔습니다. 내가 있던 학교라, 지리를 소상히 알아서 빠져 나왔지 그렇지 않았으면 꼼짝없이 전선에 끌려 갔을겝니다. 나중에 들으니까, 9월에 서울서 강모한 「의용군」은 대부분 유엔군의 인천 상륙 후 경인지구 전투에 내보냈다는 거예요. 물론 피해는 막심했구요.
지금도 눈에 선한 것은 기천서 끌려온 농민들의 순진한 모습입니다. 그분들 중에서 얼마나 살아남아서 고향에 갔는지….』

<"반동" 위협에 억지로 자원도>
▲최상민씨(당시 서울대생·현 한국특수식품사정·43) 『6월30일인가 중앙고 앞을 지나는데 괴뢰군 특무상사가 나를 불러서 보았더니 국민학교 동창이에요. 6·25전에 우리 집이 함북 청진서 도망쳐 월남한 것을 잘 알고있는 그자는 나를 반동이라고 지금의 국회별관 지하실로 끌고 가더니 총살한다는 거예요.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해서 겨우 풀려 나왔지요. 이래서 나는 그들에게 위장 협력하기로 하고 민청조직에 힘쓰다가 「의용군」에 나가니까 「식사관」이란 감투를 씌워 주더군요.
처음에 종로국교에 있다가 휘문 중학으로 옮겼지요. 내 직책이 의용군 식사관리 뿐 아니라 그들 감시역할도 겸했기 때문에 가족들이 나에게 많은 청을 넣었어요. 괴뢰상관 몰래, 대개는 들어주었습니다. 유엔군의 인천 상륙 후 나는 훈련소에서 쓰레기를 구루마에 잔뜩 실은 다음 버리고 와야겠다면서 김호직 박사(고인) 외아들 신환군(당시 경기중6학년·도불) 봉환군(당시 경복중4학년·도미) 유광희씨(현 메디컬·센터 의사) 등 7명의 「의용군」에게 구루마를 끌고 밀게 하면서 탈출했다가 수복을 맞이했지요.』 한편 낙동강 공방전에 끌려나간 「의용군」들은 전세가 북괴 측에 불리해지자, 대거 전선 이탈을 꾀하다가 붙잡혀 상당수가 총살당했으며, 심지어는 탈출방지의 본보기로 매일 몇 명을 계획적으로 처형한 사실이 다음 증언에서 밝혀지고 있다.

<전투 한번 하면 반수가 이탈>
▲오기완씨(당시 적105 「탱크」사단정치장교=대위·62년 남파귀순·현 ○○부대근무·42) 『북괴군에게 최강을 자랑하던 제105「탱크」사단은 낙동강 전선에 도착했을 때에는 탱크는 거의 다 깨지고 사실상 보병 사단이나 다름없었죠. 8월초부터 소위 의용군들로 병력보충을 받았는데 하루에 7백 내지 1천명씩 받았어요. 「의용군」이란 참 형편없는 군대더군요. 훈련을 못 받은 오합지졸이란 것은 알만하지만 도대체 전의가 없어요. 한차례 전투를 하고 나면 보통 반수 이상 어떤 때는 3분의 2이상이 없어져요. 전사하는 것이 아니라 도망치는거죠.
전투가 없을 때에도 배치를 해놓으면 도망하는 자가 많았어요. 그래서 북괴군 간부와 정치장교들은 철저히 감시를 하고 도망병을 잡아다 즉결 처분을 했지만 소용이 없어요. 골치를 앓던 끝에 정치장교들은 회의를 열고, 사단 산하 3개 연대 본부에서 무조건 의용군 l명씩을 공개 총살키로 했습니다. 낮에 참호 속에서 다들 졸고 있는데 혹 안 졸고 있는 자가 있으면 「너 도망갈 궁리하는 거지」하면서 쾅하고 쏘아 죽이는거죠. 이렇게 이유 없이 「의용군」을 각 연대에서 하루에 3명씩 공개 총살했더니 도망자가 좀 줄어듭데다. 이렇게 탱크사단에서 1개월 반 동안 「의용군」들은 시범적으로 희생시켰지요.』
강제로 끌려나간 나이 어린 「의용군」들이 얼마나 고민하며 살려고 몸부림치다가 죽어갔는가는 휘문중학 6학년에 다니다가 낙동강 영천전투에 투입되어 전사한 어느 학생의 일기첩에 애절하게 기록돼 있다.
이 일기첩은 국군이 영천회전에서 대승한 후 전사한 그 학생 시체 옆에 있던 것을 주운 것이다.

<"누구를 위해 총을 드나?">
『▲7월25일=아무리 생각해도 피할 도리가 없다. 피하려면 용감한 행동이 필요한데 나에게는 그만한 용기가 없다. 나는 누구를 위해서 총을 드는가? 어떻게 해야만 살 수 있을까. 등록하러 나오라고 해 놓고는 전선으로 끌고 가다니…용기가 없어서 나는 잡히고 말았다.
▲8월9일=사랑하는 S가 보고 싶다.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녀는 아마 시골 고향에 내려가 있겠지. 내가 이렇게 끌려 와 훈련을 받고 있는 것을 모를 것이다. 한번 만났으면…꿈과 현실, 현실은 너무나 가혹하다.
▲8월10일=상상외로 출발이 빠르다. 2주일 동안 훈련을 하고 전선으로 내모는 군대가 이 세계에 또 있을까. 미군과 국군이 신무기를 사용하여 고참병들은 다 죽었는가. 아마 다 죽었을 것이다.
전쟁영화에서 보는 무서운 병기와 장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분명 희망 없는 전쟁이다. 나는 좌익이 아니건만, 「인민군」이 된 이상 좌익이라 하여 총살 안 당한다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흥분, 비애, 원망 그리고 절망적인 기분이 서로 교착하여 이상한 심리작용을 일으킨다.

<아기시체 보고 죽음 절감>
▲8월15일=의성에 도착했다. 최전선이다. 포성이 은은하다. 오늘이 8·15해방기념일이다. 나에게는 해방도 승리도 귀찮다. 차라리 포로나 돼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어디서 언제 어떻게 도망쳐 나갈 수 있을까. 하루 종일 살아날 수 있는 방도만을 생각했다. 또 공습이다. 폭격과 기총소사, 트럭이 불탄다. 몇 명이 또 죽었다. 죽음…아! 무섭다.
▲8월27일=전진 또 전진-그러나 죽음의 전진에 틀림없다. 길가에서 7, 8세 좀된 어린애 시체를 보았다. 비통한 생각, 이루 말할 수 없다. 피란 가다가 죽은 것이 틀림없다. 손에는 사과 한 개가 쥐어져있다. 그 애 가슴에 이름 모를 꽃 한 송이를 꽂아주고 길옆의 콩밭에 묻어주었다.
▲9월3일=어제 점령한 고지에 미군은 무섭게 집중포격을 가한다. 많은 병사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아! 미칠 것만 같다. 다시 총공격이 개시된 모양이다. 그러나 절대 승산 없는 전투다.
낮에는 숨어있고 밤에는 움직이는 원시적인 수송과 비과학적인 전투가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가. 운이 좋으면 나는 포로가 될 것이다.

<미군 「비라」 주워 넣고 전사>
▲9월8일=전투는 절정에 달했다. 비오듯 떨어지는 폭탄과 포탄, 과연 나의 생사가 결정되는 날에 틀림없다.
나는 목표도 없이 마구 총을 쏘아댔다. 비행기에서는 「비라」를 뿌리고 있다. 나는 그것을 보고 포로가 되기를 바랐다. 포로가 되려면 후퇴할 때 죽은 체 하고 쓰러져 있으면 될 것이다. 후퇴하는 날은 분명히 박두했다. 나는 몰래 「비라」 한장을 주워 호주머니에 넣었다. 이것이 내생명의 보증서다.
▲9월11일=아, 귀중한 젊은이들이 뜻하지 않게 이상에 맞지 않은 위험 앞에 떨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원통하지 않은가. 우리들은 조국의 「엘리트」다. 그런데 수십만의 이 「엘리트」가 누구를 위해 죽고 있는가. 6·25직후에 느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매력은 이미 없어지고 오히려 지금은 강력한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부패했지만 대한민국 자체는 자유스럽고 우리의 이상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마음의 조국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탈린」의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피를 흘리고 있다. 이렇게 억울한 일이 인류 역사상 그 예가 또 있었던가. 이제 나에게는 과감한 행동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휘문중학생의 일기는 9월11일로 끝이나 있다. 이 학생은 이날 밤 아니면 그 이튿날 전투에서 죽은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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