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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금리 황금기 가기 전에 … 짝짓기 서두르는 기업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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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기업 인수합병(M&A) 퍼즐’이란 말이 올 상반기에 유행했다. 돈값(금리)이 싼데도 M&A 시장은 살아나지 않아서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올 1~5월 사이에 제공된 M&A용 대출이 2006년 같은 기간과 견줘 60%나 줄었다”며 “경제 상식이 깨질 판”이라고 지난 5월 보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상황이 돌변했다. M&A 시장이 회복 수준을 넘어 갑자기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지난 2일 미국 통신회사 버라이즌은 영국 보다폰이 갖고 있는 버라이즌와이어리스 지분을 1300억 달러(약 141조원)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역사상 셋째로 큰 M&A다. 시장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은행 돈 빌려 인수 … 금리 오르기 직전 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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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과 하루 뒤에는 마이크로소프트(MS)가 노키아 휴대전화 사업부문을 72억 달러(약 7조8000억원)에 사들이겠다고 깜짝 발표했다.

일본의 주류·음료기업 산토리는 영국 제약업체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이 보유한 음료 브랜드 ‘루코제이드’와 ‘리베나’를 13억5000만 파운드(약 2조3000억원)에 사들이는 계약을 9일 체결했다. 지난 8월 매물로 나온 블랙베리도 새 주인 찾기를 서두르는 중이다. ‘빅딜’ 전성기다.

 통계에도 잘 나타난다. 블룸버그통신의 분석에 따르면 지난 7월부터 9월 10일까지 글로벌 M&A는 4687건이 성사됐다. 금액으로 따지면 총 5665억 달러에 달한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지난해 국내총생산(GDP·5970억 달러)과 엇비슷하다. 이런 추세라면 3분기 중 6000억 달러를 훌쩍 넘어 2분기(4846억 달러)보다 20% 이상 늘어날 전망이다.

최근 석 달간 614조원 … IT·부동산·식품 순

 갑자기 M&A 빅딜이 붐을 이루는 이유는 무엇일까.

 로이터통신 등은 기업의 최고경영진이 글로벌 경제의 회복을 낙관하게 된 점을 첫손가락에 꼽았다. 이제 기업들이 긴 동면에서 깨어나 본격적으로 사업구조를 개편하며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다는 해석이다. 특히 미국·유럽·일본 등 선진국 기업들이 그렇다.

 미국의 2분기 경제성장률은 1.7%로 잠정 발표됐던 것이 2.5%(연율)로 상향 수정됐다. 일본의 2분기 성장률도 2.6%(잠정)에서 3.8%(확정)로 크게 뛰었다. 유로존(유로화 사용권)은 2분기에 경기침체의 터널에서 빠져나와 플러스 성장(연율 1.1%)으로 돌아섰다. 중국 경제는 경착륙 우려에서 벗어나 올해 정부가 목표한 성장(7.5%)을 무난히 달성할 것이란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또 하나는 금리 움직임이다. 미 연방준비제도(Fed)가 지난 6월 양적완화 축소 계획을 공언한 뒤 글로벌 금리는 상승 추세로 접어들었다. 주요 선진국의 경기회복과 맞물려 양적완화 축소가 단행되면 금리 상승은 탄력을 받을 공산이 크다. M&A를 마음먹은 기업들 입장에선 금리가 더 오르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움직여 자금을 확보하는 게 유리하다.

 미국 투자은행 뱅크오브아메리카(BOA) 메릴린치의 인수합병 부문 책임자 에이드리언 미는 FT와의 인터뷰에서 “양적완화 축소가 임박한 상황에서 M&A 빅딜이 잇따라 성사되고 있는 것은 바로 금리 흐름 때문”이라고 말했다. “특히 차입매수(LBO)에 나서는 기업들은 금리 때문에 초조해하고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M&A는 ‘쩐의 전쟁’이다. 요즘 글로벌 기업들이 상당한 현금 자산을 보유하고 있긴 하지만 막상 M&A에 들어가면 엄청난 외부 자금을 차입한다. 돈이 일부 부족하기도 하지만 으레 금융회사들을 끼고 외부 자금을 쓰는 게 M&A 시장의 생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LBO는 M&A 딜의 빼놓을 수 없는 감초로 통한다. 특히 딜 규모가 크면 클수록 금리에 민감하다. 현재 미국의 10년 만기 국채금리는 2.93%로 3%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1년 전 이 금리는 1.4%에 불과했는데 배 이상으로 올랐다.

 1980년대 후반에도 금리 상승 흐름이 LBO 빅딜을 부추긴 적이 있다. 87~90년 사이 미국을 휩쓴 기업사냥 붐이다. 월스트리트 역사가인 존 스틸 고든은 “당시에도 Fed가 돈줄을 죄기 시작했다”며 “저금리 시대가 끝나기 전에 필요한 기업을 사두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고 설명했다.

1987년 기업사냥 열풍 26년 만에 재연

 그 시절 LBO의 주역이 바로 희대의 기업 사냥꾼 로버트 캠푸다. 그는 미국 의류 체인점 앨리드스토어를 당시로선 어마어마한 돈인 20억 달러를 들여 사들였다. 정작 캠푸의 자금은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나머지는 월가 투자은행들이 캠푸가 발행한 정크본드를 담보로 잡고 빌려준 돈이었다.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다. MS의 노키아 인수 등에 직접 관여했던 JP모건체이스의 기술·미디어·통신부문 대표 제니퍼 네이슨은 블룸버그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금리 상승 가능성이 M&A 시장을 뒤흔드는 ‘퍼펙트 스톰(the Perfect Storm)’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말했다. FT도 “금리가 1%포인트만 올라도 버라이즌이 보다폰의 지분을 인수하는데 추가로 부담해야 할 돈이 연 6억 달러에 이른다”며 “저금리 대출 황금기가 저무는 게 기업의 M&A를 재촉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M&A 빅딜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경영자문업체 딜로이트는 올 하반기 M&A 건수는 1만4652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근 M&A가 가장 활발히 이뤄지는 분야는 정보기술(IT) 쪽이다. 경기 흐름에 가장 민감하면서 기업의 부침이 심한 분야다. 중후장대 제조업 쪽은 아직 M&A 붐이 조성되지 않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올 들어 업종별 M&A 규모는 IT(2323억 달러), 부동산 개발(1018억 달러), 식품(757억 달러), 에너지(749억 달러)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인수합병 대상 기업의 국적을 따졌을 때는 북미(7733억 달러)에 이어 유럽(4236억 달러), 아시아(2777억 달러) 등 순이었다. 중견·중소기업들의 M&A도 아직은 부진하다. M&A 금액이 늘어나면서도 건수로는 아직 답보 상태인 이유다.

 글로벌 금융전문지 유로머니는 전문가들의 말을 빌려 “M&A 시장에도 양극화가 여전하다”며 “거래 금액에 이어 건수까지 본격적으로 늘어나기에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인다”고 진단했다.

강남규·조현숙 기자

차입매수(LBO)

자금 차입에 의한 기업 매수(Leverage dbuyout)를 말한다. 현금이 부족하거나 차입이 오히려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기업은 다른 회사를 사들일 때 돈을 빌려 인수 자금을 조달한다. 이때 인수 대상 기업의 자산을 담보로 금융기관에서 맡기며, 차입금은 단계적으로 갚아 나간다. 기업의 자산만을 노린 적대적 인수합병에 악용될 소지가 있어 한국에선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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