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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르를 50년이나 했으니 이제 끝낼 때도 됐다”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오른쪽)가 6일 도쿄에서 은퇴 기자회견을 마치고 스튜디오 지브리의 프로듀서 스즈키 도시오와 악수하고 있다. [도쿄 AP=뉴시스]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72) 감독이 은퇴한다는 소식은 가히 메가톤급 폭탄이었다. 일본이 아닌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국제영화제 기자회견장에서, 그것도 미야자키 본인이 아닌 그가 소속한 제작사 ‘스튜디오 지브리’의 사장 입에서 은퇴란 말이 나오자 일본 열도는 충격에 빠졌다.

 소식이 전해진 1일 밤부터 거의 모든 방송이 톱 뉴스로 취급했고 신문들도 1면에 큼지막하게 다뤘다. 일본이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인 미야자키 감독은 왜 지금 물러나려 하는 것일까.

 은퇴 1보가 나온 지 닷새 후인 6일 미야자키 감독이 마련한 기자회견장으로 13개국에서 600명이 넘는 기자들이 몰려왔다. 쏟아진 질문만 30여 개. 한 시간 반 동안의 기자회견은 마치 미야자키 인생의 축소판 같았다. 웃음과 진지함, 그리고 일반인들이 결코 넘볼 수 없지만 공유할 수밖에 없는 철학과 세계관이 그곳에 있었다.

 그는 먼저 자신의 은퇴 이유를 설명해 나갔다. 먼저 ‘체력적 한계’를 솔직히 인정했다.

 “애니메이션 감독마다 일하는 스타일이 다르다. 그런데 난 감독이라기보다는 애니메이터다. (직접) 그리지 않으면 표현할 수 없다. 아무리 절제해도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해가 지날수록 줄어들고 있다. ‘벼랑 위의 포뇨’(2008)에 비하면 (작업하다) 책상에서 일어나는 게 30분가량 빨라졌다. 나이가 들면서 발생하는 문제는 (사람의 힘으론)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난 내 스타일을 관철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 이상 장편 애니메이션은 무리라는 최종 판단을 했다.”

 미야자키가 책상에 앉아 안경을 벗고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는 시간은 하루 7시간. 50년 동안 쌓아온 명성을 후배에게 그림을 맡기는 식으로 연명한다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1 최신작‘바람이 분다’. 5일 국내에서도 개봉했다. 2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3 ‘이웃집 토토로’.

“이 세상은 살아갈 가치 있음을 계속 전할 것”
다음 작품을 할 경우 언제쯤 완성될 것인가도 따져봤다고 한다. “이번 ‘바람이 분다’는 전 작품(‘벼랑 위의 포뇨’)이 나온 뒤로 5년이 걸렸다. 앞으로는 이게 6~7년으로 늘어날 텐데…, 3개월 후면 만으로 일흔세 살이 되는 내가 여든 살이 돼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기에는 여러모로 민폐다.”

 애니메이션 평론가인 후지즈 료타(藤津亮太)는 “미야자키 감독의 스타일은 기획과 그림 콘티뿐 아니라 각 컷의 원화(原?)에까지 모두 직접 관여하는 것으로 소문나 있다”고 말했다. 게다가 미야자키는 최근 심한 어깨 결림과 집중력 감소를 호소해 왔다고 한다.

 하지만 은퇴를 결심한 배경이 건강문제뿐만은 아닌 듯하다. 미야자키 본인의 진짜 ‘속마음’을 추측하기 위해선 미야자키가 존경하는 작가 한도 가즈도시(半藤一利·83)의 설명을 들어볼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은 최근 대담집을 출판하는 등 각별한 사이다.

 한도가 미야자키의 은퇴 배경으로 꼽는 건 놀랍게도 ‘애니메이션 50년 시효’론. 미야자키가 한도에게 털어놓은 고뇌는 다음과 같다.

 “한 선배로부터 ‘하나의 장르가 융성한 다음 종말을 맞이하기까지의 시간은 대체로 50년이다’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일본에서 데즈카 오사무 감독이 ‘아톰’을 시작한 게 1963년이니 애니메이션도 곧 끝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솔직히 나도 ‘50년이나 했는데 이제 끝낼 때가 됐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그는 은퇴 후 어떤 길을 택할까. 그는 회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은퇴 후에) 하고 싶은 일은 있다. 하지만 이뤄내지 못하면 창피하니까 말하지 않겠다.”

 그렇다고 미야자키 감독이 정치로 뛰어든다거나 원전 반대 운동이나 개헌저지 활동 등 ‘거창한’일은 하지 않을 듯하다. 그는 지난 7월 참의원 선거 전 ‘스튜디오 지브리’의 잡지를 통해 개헌을 추진하는 아베 정권을 맹비난했다. 회견에서도 이와 관련된 질문이 나왔지만 그의 답변은 담백하면서도 명확했다.

 “난 문화인이 아니다. 문화인이 되고 싶지도 않다. 난 마치코바(町工場·동네에 있는 작은 공장)의 아저씨다. 그냥 집과 직장을 내가 직접 운전하면서 왕복할 수 있는 동안에는 ‘일’을 계속할 것이다. 난 50년 동안 이 세상 어린이들에게 ‘이 세상은 살아갈 가치가 있단다’라는 걸 전하고 싶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10년간은 그럴 생각이다.”

 그 ‘일’에 대해 “애니메이션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대신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했다. 예로 든 것이 도쿄 외곽에 있는 ‘지브리 미술관’의 관리다. 그는 “매일 청소를 하는데도 세월이 지나면 어느 사이엔가 (작품의) 색이 바래기 마련이다. 신기하게도 하나를 고쳐 그려 전시하면 그 앞에 어린이들이 몰려든다. 그걸 해야 한다. 물론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매일 아틀리에에 출근해서 말이다.”

장남 등 후계 물망 … 당분간 집단체제로 갈 듯
한편 미야자키의 후계자에도 관심이 쏠린다. ‘게드 전기(戰記)’(2006)를 감독했던 장남 미야자키 고로(宮崎吾朗·46), 96년부터 ‘지브리’의 감독으로 일하며 ‘마루 밑 아리에티’(2010) 등을 기획한 요네바야시 히로마사(米林宏昌·40) 등의 이름이 거론된다.

 또 미야자키 감독이 최근 “(신세기 에반게리온 시리즈의) 안노 히데아키(庵野秀明·53) 감독이 (미야자키 감독의 1984년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속편을 만들고 싶어한다”는 말을 자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안노 후계설도 거세다. 그는 최신작 ‘바람이 분다’에서 성우로 활약하기도 했다. 하지만 누가 후계자가 돼도 당분간은 현재 지브리의 프로듀서인 스즈키 도시오(鈴木敏夫·65) 등과 집단체제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란 데는 이견이 없다.

 미야자키 감독은 회견에서 “한국에선 ‘바람이 분다’가 태평양전쟁에서 쓰인 전투기 ‘제로센’을 다루고 있어 (군국주의 미화라는) 논란이 있다”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그에 대한 여러 의문은 (한국뿐 아니라) 내 가족이나 스태프에게서도 나왔다. 난 그에 답하는 형태로 작품을 만들었다. 이 영화는 일본의 군국주의가 ‘파멸’로 향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1941년 도쿄 출생. 가큐슈인(學習院)대 정치경제학부 졸업. 63년 도에이애니메이션에 입사했다. TV시리즈 ‘알프스 소녀 하이디’ ‘플란다스의 개’ 등으로 발군의 실력을 과시했다. 85년 스튜디오 지브리를 세우고 극장판 ‘이웃집 토토로’ ‘모노노케 히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 등을 선보이며 일본 애니메이션의 위상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김현기 도쿄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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