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71)대전의 25시(10)|미24사단의 혈투(4)|6·25 20주…3천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역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북괴군은「딘」소장이 처음 판단한 것처럼 점령한 제 2사단과 대평리 정면의 제3사단, 논산으로 돈 제4단, 그리고 주력을 공주 쪽으로 옮긴 제 105 탱크사단의 4개 사단을 가지고 대전을 포위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북괴군 제2사단이 한국군의 완강한 저항과 험준한 도로 때문에 진출이 부진하자 북괴군은 10일 아침에 3개 사단만으로 대전에 대한 총 공격을 개시했다.
대전전면의 대평리에 포진한「델로이」대령(주=휴전 후 유엔군사령관 역임)의 제19연대도 17일 적의 강습으로 궤멸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사태는 절망적이었다.
적의 공격 개시와 함께 사실상 대전 공방전은 혼전상태로 들어갔다.

<7일 밤부터 적 게릴라 잠입>
이때의 상황은 여러 기록 뿐 아니라 미제 24사단에 배속됐던 한국군 연락 장교와「딘」소장 통역으로부터 직접 들을 수 있다.
▲김종면(구 명종평)씨 (당시 미24사단 파견 연락장교=육군대령·육군정보국장 겸 특무부대장·예비역준장·현 서울신문 상임감사·47)『6·25가 나기 3개월 전에 국군 고급장교 33명에 일본 점령 미군부대에 3개월 예정으로 시찰 겸 훈련을 받으러 갔었습니다. 나는 미24사단과 함께 일본에서 대전으로 왔는데 육본에서「딘」사단에 눌러 앉아 연락장교를 하라고 해서 거기 있게 된 겁니다.
「지미·김」(김길준)·김환덕·「언더우드」제씨와 함께 딘 장군을 보좌했지요. 17일 밤이 되니까 벌써 민간 복장을 한 적 게릴라들이 시내에 들어와 총을 쏘곤 해요. 18일에「딘」소장으로부터 한국군 제 1군단과 미군과의 전투 경계선을 분명히 하고 오라는 명령을 받고 그날로 보은에 가서 김홍일 군단장을 만나고 다시 대전으로 돌아왔습니다. 기록에도 있지만, 당시「딘」장군은 북괴군 제 2사단이 중부의 한국군 전선을 뚫고 대전을 동북에서 포위, 24사단의 대구와의 보급선을 끊을까 무척 신경을 썼습니다.

<18일에는 대전 완전포위>
18일에 국방부 제 2국장 김일환 대령이 대전 역에서 권총을 빼들고 대구로 철수하는 마지막 군수물자를 화차에 싣고 있는 것을 봤어요. 육본은 한국군의 작 전권 이양과 함께 이미 16일에 그리고 마지막 피란 정부도 16일에 모두 대구에 내려 갔었지요
그래서 18일 하오부터는 대전에는 전투요원은 미국 뿐 이었습니다. 19일에「딘」장군과 함께 현재 공군 기술 대대가 있는 유성 쪽으로 나갔더니 적의 박격포 탄이 떨어져요. 이곳에는 17일 대평리에서 큰 손실을 입은 미 19연대 본부가 있어「딘」장군이 격려 차 간 거지요. 이날까지 적 정규군은 시내에까지는 안 들어왔어요. 그러나 완전히 포위된 것만을 알 수 있었지요
지금의 충남도청의 맞은 편에 있던 24사단전방 CP에 돌아오니까, 직선거리로 1㎞쯤 떨어진 산 위에 적 게릴라들이 개인 호를 파는 것이 빤히 보여요. 그자들이 박격포 1문만 갖고 있더라도 사단 CP는 녹았을 겁니다.

<20일 새벽엔 적 탱크시가로>
이때「딘」장군은 얼굴이 까맣게 타고 팔뚝은 모기에 물려 퉁퉁 붓고 군복은 땀에 절어 모습이 말이 아닌데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대전을 사수하겠다고 해요.
그러나 나는 판단하기에 전술상으로 이미 대전에 희망을 걸때가 아니라고 보았지요. 적 주력 부대는 대전 둘레를 포위하고 소부대를 침투시키면서 죄어드는 작전을 펴고 있었거든요. 솔직히 말해서 나는 사지가 돼버린 대전을 빠져나가고 싶었습니다. 나야 한국군에 연락을 취하고 온다면서 나가버리면 그만이니까요. 그런데 딘 장군의 얼굴을 보니까 차마 그럴 수가 없어요
하룻밤을 세우고 20일 새벽 4시쯤 되니까 3대의 적 탱크가 유성 쪽 가도에서 대전 시내로 들어오면서 위협 포격을 가해왔습니다. 그 중 2대는 사단 CP 5백m 앞길에서 미군 병사가 3.5인치 바주카포로 부쉈는데 나머지 한 대는 도청 앞을 통해 대전 중학 쪽으로 유유히 달리며 포격을 계속해요

<하오5시「딘」철수 명령>
이 탱크는 사단 CP를 못 보았는지 그냥 지나가더군요. 이것을 본「딘」장군은 래츠·고라고 소리치면서 스스로 바주카로르 FAP고 지프를 타고 적 탱크의 뒤를 쫓아요. 운전병과 단 둘만이 대전 중학 앞을 조금 지나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탱크 꽁무니에다 바주카포를 명중시켜 이를 부쉈습니다.
20일 저녁 5시쯤 되니까 적 정규군들이 들어와 시내가 불바다가 됐습니다. 이렇게되자「딘」장군은 비로소 철수 명령을 내렸지만 혼전 상태니까 거의 각개 행동을 한 셈이지요. 나는 19연대의 패전 1개 대대와 함께 대전 중학 쪽 길은 이미 차단됐기 때문에 역 쪽 길을 통해 옥천을 향해 달렸습니다.
그런데 굴다리 근처에서 적과 만나 분산됐는데 이때 한국군 대령 계급장을 단 내가 우군이 있는 옥천으로 안내할 테니 나를 따르라고 고함을 쳤지만 한 명의 미군도 뒤따르지 않아요

<「딘」장군 퇴로는 금산방면>
할 수 없이 혼자서 뛰다가 길 잃은 10여명의 미군을 만나 앞서와 같은 말을 했더니 이번에는 따라와요. 이들과 함께 21일 아침10시께 옥천으로 빠져 나왔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뒤따라 대전을 철수하던 딘 장군은 굴다리 입구에서 우리가 만났던 적을 피해 금산 쪽으로 가다가 실종됐다 더군요.』
「딘」소장이 마지막까지 대전에 남아 용감히 싸웠다는 것은 이상의 김종면씨 증언뿐 아니라 다른 기록에도 소상히 묘사돼 있다. 특히 직접 바주카포를 들고 적 탱크와 대전했다는 것은 여간한 용기를 가지고는 해낼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일부 기록에는 사단장이나 그 밖의 24사단 고급 지휘관들이 이런 식으로 전투를 한데 대해 그 용감성을 높이 찬양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약간 비판을 가하고 있다.『한국전쟁 초기의 미군 고급장교의 사상자와 실종자 수는 남북 전쟁 이후의 어떤 전쟁 때 보다 높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미군 각 연대는 좋은 무전기가 몇 대밖에 없었고 지휘소와 일선 부대 사이의 연락은 거의 완전히 두절된 상태에 있었다. 상황을 파악하거나 명령을 전달하려 할 때는 지휘관들 자신이 현장에 나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지휘관들 병사역에 비판도>
그리고 하사관이나 하급장교들에 대한 존경심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병들은 빈번히 명령을, 특히 달갑지 않고 인기가 없는 명령일 경우에는 무시하려고 들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하급 장교들은 곧 체념해 버렸다. 수많은 하급장교들이 무모한 행동으로 목숨을 잃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족하지 않았다.
영관급 장교와 장성들이 바주카포 발사 반에 직접 끼이거나 소총 전을 지휘하는 경우가 그토록 많이 생긴 것은 그들이 이성을 잃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보브·마틴」대령이 적 탱크와 맞서다가 전사하고는 던 소령이 행방불명되는 경우가 발생한 것이다. 이러한 귀중한 희생도 의당 그럴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해버리면 그만일 것이다. 그들 역시 생명을 바치는 직책에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식으로 전쟁을 한다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니었다.』
「딘」소장 자신은 그의 한국 전쟁 체험수기인『죽음의 생활3년』(My Three Year As A Dead Man by Maj·Gen. William F. Dean)에서 대전에 끝까지 남은 이유로서 ①미군 부대의 사기를 유지하고 ②한국군의 지휘관에 모범을 보여 그들의 신뢰를 얻고 ③북괴군의 전투상황을 직접 보기 위해서였다고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나는 대전을 지키기 위해 금강 근방에 새로운 방어선을 치고, 34연대와 19연대를 나란히 배치하고 큰 피해를 입은 21연대는 비행장에서 재편토록 했다.

<「딘」, 적 전력 보려고 시내잔류>
17일 밤에 적의 강압으로 전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래서 각 연대에 후퇴 명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사단 사령부도 대전 시외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나만은 대전시에 머물러 있기로 했다.
물론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는 남들보다 모든 일을 더 잘할 수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듯이 나도 적군이 대전 공격에 있어 충분히 그 대가를 지불케 했다고 인정되기를 바란다.
이때 미 미제 1기병사단은 차츰 전선으로 가까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만일 우리가 금강 주변만 장악하고 있으면 증원 기병사단과 합류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7월20일까지 대전에 버티고 있었다.』

<북괴군도 탱크 10대 손실>
한편 대전 공방전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미군이 적 탱크를 부술 수 있는 새 무기인 3.5인치 바주카포를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7월3일에 맥아더 사령부가 긴급 요청한 3.5 인치 포는 7월8일에 캘리포니아에서 교육 반과 함께 공수되어 10일에 대전에 도착했다. 24사단은 12일에 각 부대에 배치하여 동행한 교육 반이 조종법을 가르쳐 겨우 대전 공방전에 사용할 수 있었다. 대전 전투에서 미군이 이 3.5인치 포로 깬 적 탱크는 10대에 이르렀다. 「딘」장군도 스스로 이 무기로 탱크를 부쉈다. 이로써 미군의 적 탱크에 대한 공포감은 많이 완화되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