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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에 견훤의 사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최근 경북의 가장 산악지대인 문경군내의 고적을 답사한 정영호 교수는 충북 괴산 및 상주와의 접경을 이루는 산골에서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처음 세력을 규합하던 곳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8월초의 10일간 단국대 고적답사반을 인솔한 정교수는 농암면 궁기리 일대에서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의 기록과 매우 일치하는 유적을 확인하고 또 전설을 수집했다. 이 조사에는 동 대학의 차문섭 교수도 참가했다.
문경읍내에서 서남으로 1백여리. 속리산 뒤편에 속하는 이곳에는 낙동강 최 상류의 능암천을 끼고 성터와 궁터 및 지렁이 전설이 서린 소가 있으며 지명 역시 사실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음이 밝혀졌다고 정 교수는 주장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견훤은 상주 땅의 가은 사람이라 하고 그 아비는 아자개라 하였다. 또 삼국유사에는 아자개는 진덕왕의 후손이라 하고, 또 고기를 인용하여 북촌 부잣집 딸이 붉은 옷의 남자와 더불어 교혼하여 아들을 얻으니 곧 견훤인데 어려서 범이 와서 젖을 먹였고 장성하매 기상이 범상치 않았다고 소개하였다.
또 진성여왕 6년에 반심을 품고 무리를 모아 인근 주현을 점령하고 드디어 무진주에서 왕이 되었다고 하였다.
현 농암면은 옛 가은현의 일부이며 현 가은면의 서쪽에 인접해 있다. 해발 3백m의 산지마을인 궁기리는 「아차동」(아자동) 혹은「고기부락」이라고 하며 1천m를 헤아리는 소백산맥의 연봉이 병풍처럼 4면에 둘러쳐 있다. 뿐더러 이 마을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전설화가 채집되었다.
①견훤의 어머니가 지렁이의 화인과 관계하여 아기를 낳았으며 그 어머니가 한 사내와 잠을 자며 옷에 바늘을 꽂아놓고 따라가 보니 능소에 들어갔다. 그 설화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비슷하며 마을에는 지금도 신성시하는 용소가 있다.
②앞산 절벽 위에 「말바위」가 있는데 한 장수가 여기서 백마를 얻어 화살보다 느리면 목을 벤다하였는데 장수가 잘못 알고 말을 죽이자 비로소 화살이 꽂히었다.
③마을 입구가 되는 응암천 변의 독립봉우리를 「성재산」「천마산」 혹은 「견훤성」이라고 일컫는다. 견훤이 이곳에서 군사를 일으켜 다른 곳으로 옮아갔다.
이 성재산은 용암천이 ㄷ자로 우회한가운데에 솟은 산으로 지금도 토성의 흔적이 역연하며 5∼6m폭의 평평한 성 자취가 있다.
이 성은 북으로 괴산, 서쪽으로 상주 화북읍 내려다보고 있으며 옛 주요통로를 지키는 요새이다. 여기서 20리 남짓한 거리인 화북 장암리에는 견훤성이라 일컫는 석성이 현존한다.
이 같은 사실은 1천 1백여년 전의 역사가 다소 만화적으로 각색되긴 했더라도 그들 주민들의 구전을 통하여 생생하게 입증되고 있다고 정 교수는 말했다.
정 교수는 또 이번 문경지구의 고적조사에서 이조후기에 그린 것으로 보이는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의 초상화를 발견함으로써 또 다른 개가를 올렸다.
이 조사영정은 농암면 서내리 청화산 정상 가까이 있는 원적사 소장품. 원효의 초상화는 거의 전하는 것이 없으며 현재 한두 폭마저 근년에 그린 것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영정은 적어도 2∼3백년을 헤아리는 유일한 고본이 될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높 1m, 폭 61㎝나 되는 이 대폭의 원효 초상화는 밑 부분이 많이 잘려졌으나 『해동초조원효조사 진영』이라 묵서돼 있다. 원만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특징있는 고격을 갖추고 있으나, 다만 복식이 이조의 그것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식적인 양식으로 처리돼있다.
이곳 문경일대는 워낙 산중이라서 비교적 전문가들의 조사가 미치지 못한 지역이다. 단국대 조사반은 작년에 이어 이번 두 번째 문경지구를 샅샅이 더듬고 있으며 이번 조사를 통하여 20여점의 비지정 문화재를 조사했다. 그중에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대승사의 4면 마애불도 의장산을 뒤져 찾아낸 것이다.
즉 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죽령 동쪽 1백리쯤 산에 큰 바위가 있는데 신라 진평왕 9년(서기 587년)에 홀연히 사면방장에 여래상이 새겨져 모두 홍사로 둘러 싸였다. 왕이 듣고 가서 예배하고 절을 일으키니 대승사라 했다』
높이 1m 80㎝내외의 이들 불상은 양각이 두드러지나 현재는 마멸이 심해 그 원 모습을 알아보기 힘든 상태라고 정교수는 전했다.
대승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화려한 대폭의 목각탱화를 간수하고 있으며 정 교수는 이에 대한 문화재 지정을 곧 신청하겠다고 말했다.
단국대 조사반은 앞으로 제3차 조사로써 이 지구에 대한 고적 답사를 끝마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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