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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분단 사 반세기 그 현장을 따라|북으로의 집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북녘 하늘을 응시하는 탑이 하나 있다. 파도소리 찰싹이는 동해안 속초시 북쪽 해변가
탑에 조각된 여인은 오른손에 피난보따리를 하나 안고 왼손은 어린 아들을 힘차게 이끌고 있다.
남루한 치마 저고리의 이 여인은 지금도 발길을 떼어 북을 향해 걷고 있다.
온몸이 지칠 대로 지쳐 보이지만 북녁을 쏘아보는 눈길은 매섭도록 차다. 수복 기념탑. 속초시에서 1954년 5월 10일 세운 것이다. 「저 어린애와 엄마는 무엇을 하고 있니?』
오징어를 씹고 있는 소년에게 물어보았다.
『아버지를 잃고 이북 고향을 찾아가는 거래요.』
『아버지를 왜 잃었다니? 38선 때문이라니?』
개구쟁이 소년은 38선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양 얼굴이 빨개 가지고 슬그머니 도망치고 말았다.
38선으로 고향을 잃은 사람들.
강원도 속초시민 7만 4천여명가 운데 함경도 사람이 40%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38선과 6·25동란으로 고향을 버리고 청진·흥남·원산 등에서 밀려온 실향민들.
속초 시내거리에는 「북청상회」「함흥주점」「함흥회관」「함흥약국」등 함경도 냄새가 나는 상점의 간판이 열 발짝도 못 가서 하나씩 붙어 있다. 한 걸음 나아가 지은 이름이 「신흥상회」. 그러나 이 집 주인도 함경남도 함흥의 흥자를 끝내 못 버리고 있다.
월남민 5백만명 가운데 함경북도 54만 9천 8백명과 함경남도 1백 12만 6천 8백명은 주로 배편을 이용, 동해안 기슭에서 새 고향을 찾았다.
흥남 철수를 비롯해 원산에서 미군 LST로 51년 1월 월남 길을 택했던 함경도사람들은 대부분 이틀 후 부산에 상륙했었다.
국군의 북진과 더불어 이들은 고향을 찾아 북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휴전으로 고향을 완전히 잃게 된 이들은 마침내 강인한 생활력으로 동해안 각 항구의 상권을 잡았다.
속초시에 새 터전을 마련, 함흥면옥을 차렸던 이섭봉씨(47)는 20년 동안 착실히 모아 커다란 「슬라브」집을 짓고 「함흥회관」이란 음식점 주인이 되었다.
새 음식점의 옥호를 좀더 진취적이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짓자는 주위의 이야기도 많았지만 이씨는 막무가내 「함흥회관」이라고 이름 붙였다.
오징어 잡이가 한차인 속초포구 한구석의 대폿집은 이름도 「고향집」. 저녁 무렵 나갔다가 새벽에 되돌아오는 오징어 잡이 길에 어부들은 이 집에 들러 회 김치에 회 밥을 먹으며 20여년이 흐른 고향동네의 기분을 그대로 살린다.
함경도사람들에 비해 평안도·황해도 등지의 월남민은 전국에 골고루 퍼졌다. 평안남도 1백 5만 4백명, 평안북도 78만 2천 4백명, 황해도 1백 26만 6천 5백명은 남한 곳곳에서 새 터전을 마련했다. 서울에만도 1백 23만 6천 5백명이 있다.<이북 5도청 집계>
그러나 북으로 향한 고향의 집념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새로워지고 있다.
1946년 토지개혁으로 땅을 빼앗기고 월남한 주진표씨(55)는 휴전 후 64년 고향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월산리를 찾아 나섰다. 지도상으로는 남쪽에 속하게 된 것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현지 군에 여러 차례 진정한 결과 군인 2명의 안내를 받아가며 들어섰다.
그러나 고향으로부터 2㎞ 떨어진 곳에서 발을 멈추어야했다. 바로 고향동네 월산리가 비무장지대 안에 들어 있었다. 마을이 멀리 보였다. 전쟁 때 폭격을 받았는지 마을의 흔적은 없고 주춧돌만이 가무스름히 눈앞에 보였다. 그러나 마을 뒤 아버님과 대대 선조의 선산이 보였다. 주씨는 이날부터 선산이 내려다보이는 2㎞밖 언덕에, 해마다 추석때면 젯상을 차려놓고 절을 하고 있다.
「아버님이 묻힌 선산을 향해 큰절을 하고 나면 그때마다 눈물이 핑그르르 돌아 북녘하늘을 원망한다』고 주씨는 말했다.
6·25 동란 후, 북에 대한 또 하나의 새로운 슬픈 모습이 이 땅에 심어졌다.
8만 4천 5백 32명의 납북인사 가족들. 아버지가 괴뢰군에 납북 당해 갈 때 아직 태어나지도 못했던 외동아들 김황씨(21)는 어머니의 손으로 성년이 되었다.
국민학교·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마다 졸업장을 들고는 그날 밤, 아버지 사진을 놓고 『이 기쁨을 같이 나누자』고 어머니와 얼싸안고 울었다.
북으로 향하는 실향민들의 집념은 정부의 통일방안이나 구체적인 통일이념 확인 등 시책과 정책에 앞서 내 땅을 찾고 내 고향을 찾겠다는 본능적인 욕구에 더 가깝다.
광복 4반세기. 아무리 세월이 흘러가도 북으로의 집념은 계절이 바뀌고 날이 거듭될수록 살 속에, 그리고 핏속에 더 넓고 더 깊게 여울져 흐르고 있는 것이다.<양태조·김경욱·주섭일기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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