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더 북한 노트북을 열며

발달장애 혹은 사이비종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김정하
정치국제부문 차장

대표적 진보 논객이자 독설가로 유명한 진중권 동양대 교수의 주장엔 개인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대목도 많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종북주의 문제에서만큼은 진 교수의 탁월함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진 교수는 통합진보당 내 RO(혁명조직)의 ‘합정동 비밀회합’ 녹취록에 대해 “완전히 정신병동”이라며 “사회적 고립에서 오는 현실적 무력감을 심리적으로 보상받으려 집단으로 과격한 환상을 발전시켰다”고 평가했다. 진 교수는 “그들의 혁명적 로망의 근거가 사라지다 보니 미군의 도발로 전쟁이 발발한다는 가상의 시나리오를 세워놓고 그 안에서 빨치산 용사 놀이를 하는 것”이라며 “(정신적) 발달장애”라고 꼬집었다. 그렇다 발달장애. 무역규모 세계 8위 국가에서 아직도 ‘민족주체혁명’을 위한 ‘속도전’ 운운하는 무리들을 발달장애 말고 뭐라고 불러야 하나.

 국회에 제출된 이석기 의원 체포동의서를 찬찬히 읽다 보니 1980년대의 향수가 물씬 풍겨 쓴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특히 “다진 맹세 변치말자 한별을 우러러보네”라는 ‘동지애의 노래’나 “비겁한 자여 갈 테면 가라 우리들은 붉은기를 지키리라”던 ‘적기가’ 같은 노래는 한동안 잊고 있던 지인들의 얼굴을 떠올리게 했다. 그런 노래는 ‘임을 위한 행진곡’처럼 광장에서 부르는 대중 운동가가 아니라 NL(민족해방) 주사파들이 골방에서 비장한 표정으로 부르던 비밀 의례가(儀禮歌)였다. 처음엔 ‘한별’이 뭔지 몰랐는데 나중에 그게 김일성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내심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대통령이 군 출신이었던 80년대~90년대 초반 일부 운동권이 그런 노래를 불렀던 건 어린 나이의 치기였다고 치자. 하지만 2013년에 아직도 떼로 모여 김일성 찬양가를 부르는 건 일종의 사이비 종교다. 사실 주체사상 자체가 ‘수령’을 정점으로 하는 완벽한 일신교(一神敎)다. 그러니 RO 조직원들이 북한에 대해 종교적 감정을 느끼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녹취록에서 부흥회 냄새가 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집단이 자기네들끼리 모여 두메산골에서 농장이라도 운영했다면 크게 상관할 일도 없었다. 하지만 이들이 진짜로 거사를 일으켜 보겠다고 정치권에 달려드는 순간 이들의 몽상은 현실적인 위협으로 바뀐다. 사실 이들은 몽상가라기보단 치밀한 전략가이자 선전·선동의 달인이다. 이들은 지난해 총선 때 유시민·심상정 등과 손을 잡고 통합진보당을 만들어 몸집을 불린 뒤 다시 민주당과 연대해 지분을 챙기는 2단계 통일전선전술을 구사해 대성공을 거뒀다.

  이제 ‘이석기 그룹’의 충격적 실상이 드러난 이상 결자해지하는 수밖에 없다. 민주당과 정의당은 헌법부정 세력이 금배지를 다는 데 도움을 줬다는 과오를 솔직히 인정하고 신속히 이 의원 체포동의안을 처리해야 한다. 그게 진보 정치의 재구성을 위한 첫 번째 과제다.

김정하 정치국제부문 차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